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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16. 2023

다시 태어나면 나무늘보

첫 번째 육아터널을 지나고 두 번째 터널이 나왔지만.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나는 블라블라 어쩌고 저쩌고"

아이의 질문 섞인 자기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며 생각한다.

나는 돌멩이로 태어날까?

요즘은 얼마 전 동화책에서 본 그 나무늘보도 괜찮아 보이던데.




"엄마 우리 식구를 동물로 나타내봐요. 나는 뭐 닮았어요?"

"응 일호 너는 귀여운 수달. 달수라고 불러야겠다."

"아하하 좋아. 달수 좋아. 이호는?"

"음. 이호는 엄마 꿈에서 돌고래로 나왔으니까, 고돌이라고 부를까?"

"아빠는?"

"아빠는 배가 많이 나왔으니까 돼지. 돼지라고 부르면 기분 나쁘니까 꽃돼지. 줄여서 꽃지? 진짜 안 어울리네."

"큭큭큭. 꽃지 아빠. 엄마는?"

"엄마는 뭐로 할까? 아, 어제 읽은 동화책에서 코끼리 나왔잖아. 코끼리는 엄마들이 주도하는 사회래. 남자들은 아무것도 안 한다더라. 우리 집이랑 똑같으니까 엄마는 코끼리 할래."


대체적으로 내 주변에는 아이의 조부모님이 근처에 살아서 최소한 긴급상황에서는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집이 많다. 거의 전적으로 아이를 케어해 주시는 할머니들도 많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살림이든, 육아든 도와주실 분이 안 계시고, 사실 내 자식 내가 키우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씩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아이는 둘이 낳았으니 둘이 키우면 좋으련만, 내 남편은 출근이 빠르고 퇴근이 늦으니 실질적으로 아이들에게 손이 가기 어렵다.

이 글을 쓸 때 고민이 되었다.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기가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시선이, 육아를 하고 있는 주부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음을 느낀다. 독박육아라는 말도 그렇다. 자기가 낳았으니 자기가 키워야지, 누구한테 독박이라고 따지는 거냐고 화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과 사회에 따지는 게 아니다. 이 말에는 같이 아이를 낳은 남자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다.

부부가 아이를 낳기로 합의하고 낳았으면 누군가는 키워야 하지 않는가. 인간의 아이란 망아지나 송아지와는 달라서 모든 것을 스스로 못하기 때문이다. 같이 낳았으니 같이 키우는 게 당연한데,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슬프다.


독박 육아만 하면 다행이게, 독박 살림도 도맡아 하고 있다. 이게 십 년쯤 되니 조금 버겁고 힘들 때가 많다가도 체념하고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 커가니 손이 덜 가고, 조금씩 나의 시간이 쌓이면서 이 생활도 참을만하다고 뭔가 남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근무할 때에는 퇴근하고 나서 집안일에 아이들 케어까지 하다 보면 왜 이렇게 사는가 싶을 때가 많았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나왔을 때 작가와 소설에 대해 악의적인 말들이 많았다. 심지어 이것이 영화화될 때 주인공을 맡은 정유미 씨와 공유 씨에게까지 비난이 쏟아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대체 왜 분노했을까. 자기가 원해서 낳은 자식을 키우는 게 힘들다고 징징대는 게 꼴 보기 싫었을까. 

힘들어서 힘들다고 말하는 게 왜 불편한지 공감하기 어렵다. 그들도 회사 생활에 대한 불합리함을 블라인드 게시판에 올리기도 하고, 꼰대 때문에 퇴사하고 싶다고 상사를 욕하며, 열정페이에 분노하지 않는가. 그 직장도 본인이 선택한 것인데 말이다. 선택하기 전에는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힘든 줄.

힘들면 불만을 가질 수도 있고, 힘들다고 표현하는 건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주부가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가정주부의 노동력을 깎아내리려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아직도 온라인에서는 독박육아라는 말은 불편하니까 쓰지 말고, '독점육아'라고 쓰자는 사람도 있다. 아이를 나 혼자 독점했으니 내가 이익이라는 거다. 맞다. 나만 아이들과 추억을 쌓고 있고 그 자리에 아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안된 사람은 바로 아빠의 자리에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그래도 나는 독점육아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 내 감정을 무시한 채 미화하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내 감정은 독점육아가 아니다. 나는 별로 아이들을 독점하고 싶지도 않다. 남편과 공유하고 싶다.




다시 태어나면 나무늘보가 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냥 사람으로 태어나도 좋을 것 같다.

내 옆에 조그만 사람 둘이 잠들어 있는 밤이면 더욱 그렇다.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코를 고는 큰 사람도 여하튼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하루에 18시간씩 잠만 자는 건 너무 좋아 보이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을 잠만 자면서 사는 건 별로지 않을까. 올해는 나의 마지막 휴직이다. 아마 일을 그만둘 때까지 앞으로 휴직은 없지 싶다. 그래서 올해는 조금 더 생산적으로 파이팅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시 복직을 한다면 나무늘보가 되고 싶겠지만, 적어도 올해는 아니다. 


독박육아는 고되고 힘들었지만 훌쩍 큰 아이들을 보면 잘 버텨낸 시간들이 감사하다. 남편의 직장생활이 나의 직장생활만큼 쾌적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여유롭게 점심밥을 먹지도 못하고, 끼기 싫은 술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안쓰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조금 크고 나니 나의 마음속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이렇게 불쑥 이해심이 있는 척하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3월이면 더 이상 영유아의 엄마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났고, 더 이상 손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제 일을 할 동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 

독박육아를 잘 버텨낸 꽤나 근사한 선물이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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