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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18. 2023

나도 김밥을 쌀 수 있다

칼을 갈다

스무 살이었다. 오빠가 입대했고, 나에게는 귀찮은, 오빠의 첫 번째 면회 날이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분주한 엄마와 다르게 나는 늦잠을 잤고, 나까지 꼭 가야 하냐는 무의미한 말만 되뇌고 있었다.

엄마는 아침부터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 잡채랑 갈비찜을 해 놓으셨다. 그리고 치킨을 한 마리 주문해 놓고 김밥을 말고 계셨다. 빨리 출발해서 아들을 보고 싶었던지 엄마는 마음이 조급해 보였다. 치킨집에 전화를 다시 한번 건 다음, 30분 후에 출발할 거라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한 마디 던졌다.     

"김밥 말아 놓은 것 좀 썰어봐라."     

"내가?"     

먹을 줄만 알았지, 김밥 한 줄도 썰어본 적 없던 나는, 마는 게 어렵지, 써는 게 어렵냐 하며, 호기롭게 칼을 들고 김밥을 한 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나 분명 들었다. 그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김밥은 죄다 터져버렸고, 나는 칼이 안 드네, 하며 칼 탓을 했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달려온 엄마는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아, 내가 김밥을 썰어본 적이 없는데 시킨 엄마가 잘못이지."     

다행히 손이 큰 우리 엄마에게는 여분의 김밥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멀쩡한 김밥을 쓱쓱 썰어서 찬합에 차곡차곡 넣었다.

신기했다. 같은 칼로 썰었는데 그녀의 김밥은 왜 매끈한 거지.




결혼하고 나서도 김밥을 싸본 적이 없었다. 김밥은 사 먹는 거지, 싸 먹는 게 아니라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유아식을 만들 때도 나에게는 꼬마김밥은 항상 제외였다. 김밥은 너무나도 고난도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런치에 입성하고 나니 다양한 김밥 글들이 나의 구미를 자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기 위해 김밥을 말아 보자는 마음도 어느 정도 나의 등을 떠밀었다.      

여러 블로그와 인스타에서 "김밥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 보았다. 다양한 방법이 있었지만, 일단은 아이들 입에 들어가야 하므로 재료가 너무 많지 않게, 아이들이 좋아하는 채소를 듬뿍 넣고, 내가 싫어하는 햄은 빼기로 했다.      

무조건 밥이 맛있어야 한다는 글을 보았다. 참기름도, 깨도 듬뿍 넣고, 나의 비장의 무기인 "연두"를 휘리릭 넣어서 밥을 쓱쓱 비볐다. 짭조름하니 맛있었다.


첫째 날,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 큰아이가 한 그릇을 뚝딱했다. 얼마 전에 "아침밥을 먹이는 일"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그런 거 필요 없었다. 정답은 김밥이었다.     

둘째 날, 유치원 버스 시간이 다가오지만 둘째는 짜증을 내다가 김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짜증이 잦아들었다. 결국 김밥 한 접시를 다 먹고 싶어 해서 유치원 버스는 포기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아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셋째 날, 그냥 또 먹는다. 넉넉히 쌌더니, 큰아이의 점심식사까지 책임져버렸다.     

넷째 날, 또 다. 이번에는 고래사 어묵을 사서 한 줄 넣었다. 큰아이는 어묵을 잘 먹었고, 둘째는 싫다고 해서 원래대로 채소와 달걀만 넣은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4일 연속으로 김밥을 싸다 보니 어느새 나는 스스로 김밥 장인의 경지에 오른 듯한 착각이 든다.     

다 먹은 아이의 그릇을 치우려니 "아니야, 깨도 먹을 거야." 하며 그릇에 떨어진 깨를 혀로 핥았다.     

오, 사람들이 왜 김밥 김밥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동안 김밥을 못싸는 엄마는 작년 아이들 현장학습 도시락에 주먹밥을 싸주었다. 나름 피카추도 만드느라 2시간 동안 도시락을 쌌다.      

작년 현장학습 도시락 깨알 자랑


하지만 올해 현장학습은 무조건 김밥이다. 브런치가 나의 엄마력을 +1 향상시켰다.         

  



오빠의 군 면회 김밥 옆구리를 다 터트려 버렸던 나는 이번에도 첫째 날에는 김밥을 몇 알 터트렸다. 엄마가 하던 대로 식칼을 사용했더니 칼이 무딘지, 계속 터졌다. 그래서 과도로 슬슬 썰어보니 꽤 잘 썰렸다. 김밥은 과도로 썰어야 예쁜 걸까.     

아니, 칼의 종류가 아니고 무딘 칼을 갈아야 쓸만한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 의지를 다질 때 "칼을 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김밥 한 줄 썰면서 칼을 갈 것까지는 없겠지만,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나의 칼을 지금 열심히 갈고 있다.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매끄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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