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건 없다, 입장차이일 뿐-
십여 년 전 우리는 서로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로 했다. 서양권 나라처럼 들러리 같은 개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친한 친구들이 결혼식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이벤트였다.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누군가의 축가도 좋겠지만, 우리의 축가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축가를 연습하기 위해 노래방으로 향했다. 요즘 노래방이 좋아진 건지 이곳 노래방이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신발도 벗고 방바닥도 뜨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노래방에 모인 미혼 여성 7인방은 동선을 짜고 안무를 정했다.
"너는 나의 노래, 너는 나의 햇살, 넌 나의 비타민 날 깨어나게 해"
뭐, 이런 노래였다.
뒤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우리 중 가장 인싸에 예쁜 정양이 발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는 임기응변에 능해서 살짝씩 틀리는 가사도 유연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십여 년 동안 하나 둘 결혼을 했고, 축가를 부르는 사이에 우리는 또 하나 둘 '엄마'가 되었다.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기에 태어난 아이들도 고만고만했다. 나는 그때 큰 아이가 백일을 앞두고 있었고, 신랑을 따라서 지방에 내려가 살고 있었다.
곧 마지막 친구의 결혼식이 잡혔던 그때, 우리는 다시 한번 축가를 불러야 했다.
아기가 어린 나는 결혼식에도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백일 아기는 젖을 먹는다. 그 한 번의 외출로 인해 아기는 유축해 놓은 젖을 먹어야 하고 젖병을 거부할 수 있지만 남편이 숟가락으로라도 어떻게든 먹일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이런 일을 두 번, 세 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당시 나의 당연한 상식이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엄마들은 대부분의 생각이 아기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같은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던 친구들의 세계는 그렇게, 아기를 '낳은 자'와 '낳지 않은 자'의 세계로 나뉘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애 때문에 연습을 못하니까 축가를 빠지겠다고? 그럼 남은 사람이 세 명인데 세 명이서 축가를 하라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지?
격양된 그녀의 카톡에 단톡방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어린아이가 없던 친구 2명도 다른 사람이 다 빠지면 자신들도 축가를 할 수 없겠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건넸다.
정양의 말이 맞다. 연습은 못해도 축가는 해야 하는 거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어린 아기를 두고 서울로 KTX를 타고 올라가서 연습을 하고 그걸 되풀이 하다가 마침내 결혼식도 참석해야 하고. 당시 나에게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지 않았지만 정양은 몹시도 화가 났다. 엄마가 아닌 친구들은 축가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일이 이기적인 일로 생각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은 입장차이였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축가는 그냥그냥 저러저러하게 무난히 치러졌다. 어쩌면 정양이 화를 내주어서 어떻게든 축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그냥 넘어갔더라면 마지막 결혼식에 우리는 축가를 하지 않았을 테고, 결혼 당사자인 친구는 두고두고 서운했을 법하다.
지금은 정양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뜻이었고, 맺고 끊음이 확실한 그녀는 이후 만남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딩크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이 소중했고, 늦은 나이까지 외국에 나가 공부할 정도로 커리어를 높이는 일에 열심히였다. 그런 그녀가 딩크를 선택한 건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처음 그녀가 딩크족이라고 말했을 때는, 이런 힘든 세상에 애를 낳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는, 축가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무한 이기주의를 내세울 때는, 나는 오히려 그녀가 더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자기가 편하자고 아기를 안 낳는 거잖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고 무조건 참석하라는 것도 이기심 아닌가, 하는 일종의 나만의 입장으로 남을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평생 연애만 할 것 같던 그녀는 사실 마음이 많이 여리고 외로운 사람이다. 함께 한 시간이 있었는데 그걸 왜 몰랐겠는가, 다만 당시의 나는 '아기'라는 세상에 갇혀 있었고, 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주변에 딩크족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참 현명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그 방향으로 끌고 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기를 낳는 게 이기적이냐, 아기를 낳지 않는 게 이기적이냐는 "이기적"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언젠가 한 토크쇼에서 중견연예인이 작사가 김이나 씨에게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애를 낳아야 한다고 꼰대짓을 할 때 나는 딩크족도 아니면서 몹시 불편했다.
이런 꼰대의 시선이 만연한 사회에서 소위 '사회적 잣대'에 반하는 행동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나에게는 없었고 정양에게는 있었던 그 용기.
어쩌면 지금쯤은 그녀도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부러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아이를 낳지 않은 삶을 부러워할 때가 많으니까. 자신의 선택에서 한 번도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의 방향을 믿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방향을 돌려 다시 선택을 할 지 결정하는 것도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도 딩크족은 다시 선택할 수 있어서 좋겠다. 애 둘 맘인 나는 날개를 빼앗긴 선녀처럼 다시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이기심"이라는 틀로 타인을 정의 내리지 말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의 입장을 조금은 인정해준다면 팍팍하지 않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날개를 뺏겼지만 귀여운 사람을 둘이나 얻은 건 행운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