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정말로 좋아.
-얼마나 좋아?
-봄날의 개만큼 좋아.
-봄날의 개?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강아지가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강아지는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을 각색했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은 '초코'다. 아이 이름을 그렇게 짓고 보니 주변의 강아지들 이름이 죄다 먹을거리라는 게 참 거슬렸다. 딸기, 쿠키, 크림, 망고 등.
초코는 8월 15일 생인데, 나중에 생각하기를 '광복'이라고 지을 걸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제 이름이 초코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개명은 쉽지 않다.
처음 초코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개도 말 못 하는 장애가 있는지 고민했다. 전혀 짖지 않았기 때문이다. 낑낑 소리도 내지 않았고, 끙끙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아파트 외벽 페인트칠 공사를 하려고 창문 너머 줄에 아저씨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계실 때 처음으로 "헝헝 웡웡"짖었다. 짖는 것도 사납게 짖지 않는다. 너무나도 순둥이처럼 짖었다.
그때 우리 식구들은 모두 놀라서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초코는 짖을 수 있는 개였어!
그 후로 그는 다시 짖지 않는다. 아이들이 괴롭게 자꾸 껴안으면 낑낑 대기는 하지만 말이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에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초코를 분명 의식했는데, 어느새 그의 존재를 잊는다. 그러다가 뒷자리를 돌아보고 "아, 초코 있었지." 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굳이 알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목소리를 거칠게 내지 않아도 너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을 녀석도 알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녀석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그 고요함이 좋다. 그냥 다가와서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면 그뿐이다. 한번 쓰다듬어 주면 다시 돌아서 간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초코를 데려왔다. 사람들마다 "애들도 어린데 개까지 키워요?"라는 말이나 눈빛을 나에게 던진다. 애들이 키우자고 졸라대서 데리고 온 건 아니다. 내가 키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강아지 다섯 마리 정도를 키우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코를 키우면서 이건 참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털이 많이 빠지니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를 해야 하고, 시시때때로 목욕과 산책을 시켜야 하며 개밥은 왜 그렇게 자주 사야 하는지, 간식도 빠트리면 안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그에게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코의 핫스팟은 창문 앞 공간이다. 오후에 내리쬐는 햇살 맛집 바로 그 자리가 초코의 지정석이다. 거기 한참을 누워있는 초코의 등을 쓰다듬으면 뜨끈뜨끈하다. 그럼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한번 눈을 치켜뜨고 꼬리를 두어 번 흔든다. 초코, 초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흔들어 대는 꼬리는 초코가 아닌 또 다른 생명체 같다. 마치 물고기가 파닥거리듯이, 흔든다.
가끔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나만 빤히 쳐다보고 앉아 있을 때가 있다. 그럼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그러면 그 녀석도 슬그머니 다른 자리로 옮긴다. 간식을 원했나, 산책을 원했나 모르겠지만 막무가내로 조르지 않는다. 포기가 빠른 녀석이다. 그래서 녀석이 좋다.
우리는 같은 집에 머물지만 서로를 귀찮게 하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서로 바라볼 뿐이다.
서로 바라는 것 없는 사이.
햇살 가득한 창가 자리에서 꼬리를 파닥거리는 초코를 보고 있노라면 졸음이 솔솔 밀려올 정도로 나른하고 기분이 좋다.
진짜 내 강아지들(자식들)에게도 내가 초코를 바라보는 종류의 시선을 던져주고 싶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기. 그러면 아이들도 초코의 꼬리처럼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려고 파닥거릴 텐데. 생동감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