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책장 Mar 20. 2023

안개 낀 고속도로

남편은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ktx를 타고 집에 온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 ktx를 타고 회사숙소로 돌아간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나는 운전기사처럼 그를 데리러 가고 데려다준다. 아이들이 좀 커서 주말 저녁 한 시간 정도를 자기들끼리 있을 수 있기에 가능한 일정이다.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영어영상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슬라임을 한다. 그래도 매번 나가있는 동안은 조금 걱정이 된다. 아이들이 겁이 많아서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어머니와 통화하다가 이런 상황을 들으시고 화들짝 놀라시는 게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애들만 혼자 두고? 큰일 나. 큰일 나. 다치면 어쩌냐?"

나는 이런 상황이 조금은 짜증 난다. 이제 초등학생인데 한 시간 정도 자기들끼리 있을 수 없을게 뭐람. 아이들을 좀 믿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게 두면 될 텐데. 그리고 이런 상황이 누구 때문인데. 시어머니의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해서 아니던가. 사실 나는 데리러 가겠다는 생각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당연히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왕복 한 시간 거리를 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그는 아니었던 게다. 데리러 와달라는데 매몰차게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 운전이 무섭다. 그를 데리러 가면서 고속화 도로를 타야 하는데 시속 100Km가 넘어가면 나도 모르게 그 속도로 달리고 있다가도 순간 속도계를 보고 무서워진다.

나는 시속 100Km로는 달릴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로에서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천천히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 그를 데리러 가는 그 길은 항상 인지부조화가 이루어지곤 한다.


2차로나 3차로로 가다 보면 천천히 운행하는 트럭을 만날 수 있다. 그 트럭의 뒤에 서게 되면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내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고, 저 앞차가 천천히 가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 진다. 책임을 트럭에게 미루었을 때 편안한 심정이 되는 것과는 다르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다시 속도를 내고 싶어 진다. 이래저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그를 봐도 반갑지가 않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을 그를 생각하면 얼굴을 보자마자 부가 치민다. 요즘 조금 더 그런 시기이다.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들러붙어버린 그에게는 차마 화를 낼 수 없고, 입을 댓 발 내밀고 설거지를 하다가 아이들을 씻기고 책을 읽어주고 양치를 시키고... 나열하기도 힘든 저녁 시간의 루틴들을 혼자서 해내고 있을 때면 차라리 그가 눈앞에 없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일은 똑같은데, 편하게 앉아있는 꼴을 보고, 나 혼자 여기저기서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들에게 불려 다니다 보면 누구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가짐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주말마다 이루어지는 인지부조화는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음이 잘 먹어지지 않는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웃어주기란 쉽지 않다. 함께 가족을 꾸리고 유지하는 것이 다만 회사를 다니기만 하는 것에서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일 텐데, 그의 속도와 방향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나 혼자 동동 거리고 미친 사람처럼 다다다다 집안일을 해치우고 있을 때 옆에서 느긋하게 굴러가는 그를 보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속도로에서 일차로로 주행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빨리 가려는 사람의 앞 길을 막고 있으면 안 되지 않는가. 추월차선은 비워두는 것이 도로의 법칙이니, 같은 속도로 달리지 않으려면 옆으로 좀 비켜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3차로의 트럭의 역할을 누군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결혼을 하면서 남편에게 그런 트럭이 되어주길 기대했는데, 내 앞에는 아무도 없으니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일들이 버겁기 그지없다.

우리의 속도는 이렇게 맞지 않아서 요즘 자꾸만 트러블이 생기고 만다.




남편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밤시간이었다. 한참 달리던 앞 차들이 너도나도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안개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눈앞이 뿌예지고 비상등으로만 간신히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던 나는 손이 벌벌 떨리고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혼자서 "어떡해. 무서워. 무서워."라는 말을 내뱉으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을 간신히 참고 겨우겨우 안개 구간을 통과했다.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안개 낀 도로. 그곳에서 멈출 수도 없고 계속 달려야 하는 상황이 극도로 두려웠다.

인생은 마치 안개 낀 고속도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고, 결국 여기서 멈출 수는 없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달릴 수밖에.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앞서 나가는 차의 깜빡이는 비상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맞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처럼, 이 방향이 맞겠지 생각하고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남편이 떠난 월요일. 눈앞에 그의 낮잠 자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안개 낀 상황을 결국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서글퍼진다.

글은 이렇게 쓰면서도 그놈의 인지부조화 때문에, 눈앞이 다시 뿌예지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하세요"의 대답은 "안녕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