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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Apr 04. 2023

우리 모두는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걸지도

사건의 지평선

지난 주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있을 때에는 의도적으로라도 책을 읽으려고 해서 거의 식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게 평소 나의 모습이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은 소파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꼼수로, 책을 펴두고 그 위에 스마트폰을 올린 후에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다가 아이들이 다가오면 후다닥 스마트폰을 책 뒤로 감춘다.

그러나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난 주말 혼자 있던 시간에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걸려들게 되어, 도대체 빠져나가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나름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이 정도이니 앞으로 아이들을 키울 일이 걱정이 되면서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내가 빠져들었던 건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곡에 대한 영상이었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말은 윤하가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물리학 용어였다. 어렵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블랙홀의 경계, 빛까지도 빨려 들어가는 그곳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 같았다. 그곳은 여기에 서있는 나와는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새로운 시공간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내는 건지, 신기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미신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건의 지평선조차도 나에게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시적이고 문학적으로 느껴졌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과거의 나를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만 남아서 우주를 만들어 간다면 좋겠지만, 현재의 나는 언제나 과거가 될 테니 그런 것은 불가능하겠지.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발매한 지 몇 년 지나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런 걸 "역주행한다"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역주행한다는 말이 과거로 간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과거로 가서 그곳의 노래를 듣고 환호하는 모습인 것일까. 나는 좀처럼 과거로 가고 싶지는 않은데,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주행이라는 말은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나의 행동에 의해서 지금의 내가 빛난다는 뜻을 포함하는 게 아닐까.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곡은 과거에 탄생했지만 지금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이라고 했지만 이 곡이 인기를 얻은 것조차도 벌써 몇 개월 전이라서 나는 역주행하는 곡조차도 혼자서 또 역주행해서 좋아하는 아주 느린 사람 같기도 하다.


맞다. 나는 뭐든 조금 느린 편이다. 태어나서 걷는 것도 남들보다 늦었다고 하고 말도 늦게까지 안 했다고 한다. 그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니 차치하고서라도, 공부머리도 늦되서 구구단은 3학년 올라가서까지 헤매고 있었고, 대학도 사수씩이나 해서 겨우 갔으니 말 다했다.

새로운 유행에 있어서도 그런데, 어그부츠가 한 창 유행할 때는 그 이상하게 생긴 모양에 기겁을 해서 그걸 대체 왜 신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며 말했는데, 몇 년 후 어그부츠가 약간 대중적이 되었을 때에서야 느닷없이 홈쇼핑을 보다 예뻐 보여서 구매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글을 쓴다고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닌가 싶다.

래 '사건의 지평선'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라는 구절이다. 젊지 않은 나이에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딱 그 부분이다. 새로운 길모퉁이에서 이렇게 서로 만났으니 길모퉁이를 돌뭐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


었을 때는 늦는다는 게 참 싫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늦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아직 하지 않은 일만 있을 뿐이다. 이런 건 젊은이에게 말해줘 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안다. 그냥 겪어보면 알게 된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도 믿음을 주는 가족이 되고 싶다가도,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른인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늘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엄마로서의 내 모습에서 역주행을 느낀다. 젊은 시절에 지금처럼 책을 읽었으면 뭐라도 됐을 텐데 말이다.


우리 가족들은 서로 사건의 지평선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하지만, 새로운 길모퉁이에서 서로 다른 모퉁이를 돌겠다면 말리고 싶지는 않다. 그건 너의 블랙홀이고, 이건 나의 블랙홀이니.


각자 자리에서 과거의 나로 인해 빛날 역주행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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