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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Apr 06. 2023

엄마의 시옷자 입모양이 싫었어

친가친척들은 한결같이 무뚝뚝했고 화를 냈다. 그게 그들의 소통방식이었지만 똑같이 무뚝뚝하던 나는 그 시공간이 숨이 막혔다. 같이 놀 친척이 하나도 없었던 것마저 내가 그곳에 정을 붙일 수 없는 이유였다.

사촌 오빠들과 사촌 남동생들. 그리고 뚱한 나.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이성사촌들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방법을 몰랐고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늘 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그날 감기에 걸리면 안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추운 날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잤지만 콧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몹쓸 면역력, 쓸데없이 건강한 내가 그날따라 원망스러웠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내가 안 간다고 버티자 아빠는 나를 데려가기 위해 같이 버텼다. 나를 그냥 두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서른 넘어했으니 참 지긋지긋했다.


큰 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해서 거의 3시간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갔다.

명절날의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았고 그때의 나는 큰집에 가는 일 말고는 지하철을 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내 기분처럼, 지하철 풍경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부모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시절에 나는 지하철에서 당당히 앉아갈 수 있었다. 그날도 나는 어린애라는 생각으로 당연한 듯 만원 지하철에서 엄마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앉아 있던 내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나라고 했다. 아마 초등학교 4, 5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키가 늘 큰 편이었고 당시에도 벌 웬만한 아가씨들비슷했으니 노인분들이 서 있는데 당당하게 앉아 있던 "다 큰 사람"이 꼴사나워 보였나 보다.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어린이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앉아 있던 엄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입술을 시옷자로 만들어서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닌데 눈을 감고 있는 엄마는 나에게 양보를 잘했다는 칭찬도, 아니면 왜 이제야 양보를 했느냐는 핀잔도 없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 억지로 양보를 한 거지만 어린아이가 민망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주지 않았던 엄마가 좀 미웠다.


지하철에서 엄마는 줄곧 그런 얼굴을 했다.

인상을 쓰듯 눈을 감고 입술은 억지로 내린 듯이, 울기 직전 못생긴 얼굴 말이다.

그 얼굴이 싫었다.


그 이후 나는 큰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면 가족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처음부터 서서 갔다.

우리 네 식구는 모두 다 떨어져서 각자 가다가 동대문역에서 서로 눈치를 보듯이 아무 말 없이 내렸다. 거기서 다른 지하철로 갈아탔는데 환승 역으로도 모두 말 한마디 없이 걸었다. 나는 방향을 알지 못하니 엄마 뒤를 졸래 졸래 따라 걸어갔지만 열 살이 넘고 나서는 엄마가 내 손을 잡아준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큰집이자 엄마의 시댁에 가는 날이면 유독 엄마는 더 내 손을 잡지 않고 걸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도 엄마의 시댁에 가는 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나만 큰집에 가는 게 싫었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감기가 걸려서라도 안 가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아니었을까.


사춘기 시절에는 가족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법이기도 하고, 가족은 견디기 어려운 존재 같아서 다들 화난 표정으로 기억에 남지만 큰집에 가는 길과 큰집에서의 나는 유독 더 화가 나 있었다.

나의 유년 시절과 사춘기 시절은 회색 같아서 못생기고 찌질함의 나날들이 전혀 아름답게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도, 아빠의 마음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나만 이해받지 못해서 억울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내가 봐도 너무 못생겼다.


이제 나는 엄마가 되었고 슬프게도 내 입술은 가끔 시옷자가 된다.

그런 걸 깨달을 때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우리 엄마처럼 딸을 대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웃음을 지어본다. 아이를 좀 더 껴안고 싶은데 벌써 사춘기처럼 구는 아이를 보면 되려 내가 울상이 되고 만다.

내 기억은 열 살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흐릿하게, 그 이후는 좀 또렷하다. 열 살이 넘어가며 더욱 많은 기억들이 의식과 무의식에 자리 잡고, 억울한 기억들만 편협적으로 각색되어 편집되는 것을 깨달으니 올해 열 살이 된 딸아이에게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대목에서 다시 내 입술은 시옷자가 된다.

나는 아직도 가족을 생각하면 왜 안 좋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강력한 사건은 없었지만, 자잘한 따뜻함도 없었기에, 나의 십 대는 온통 회색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신다. 살가운 척하는 통화를 끝마치면 가끔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따로따로 먼산만 바라보던 가족들이 떠오른다.

한 번씩 터널을 통과할 때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가 다시 햇살 위를 지나 한강을 덜컹덜컹 건널 때면 오히려 눈을 감고 싶어 지던 큰집 가는 길의 기억들이 내 사춘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시옷자 입술이 떠오르면 나는 울고 싶어 지지만 내 아이들의 기억은 그렇게 저장되지 않도록 눈을 감아버리지 않고 언제나 바라보고 있기로 다짐한다.

아이들은 떠나보낼 존재라지만 그날이 되기 전까지는 자잘한 따스함들로 가득 채우는 엄마노릇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 아이는 나의 시옷자 입술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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