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지원실에서 안내드립니다. 영하의 날씨에 동파예방을 위해 각 세대에서는 베란다 수도를 조금 틀어놓아 동파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난겨울, 아니 매년 겨울 이런 방송이 흘러나오곤 하는데, 그동안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물을 졸졸 흘려놓은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동파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얼마전 최대 한파라고 하는 날에는 안 입는 옷으로라도 덮어놔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 집 수도는 아직까지 무사하다.
그러나 설 명절에 친정집에 갔을 때는 문제가 달랐다. 친정부모님께서는 오래된 주택에 사시는데, 아빠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수돗물을 졸졸 흘려놓아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그거 잠그지 말라고 단단히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그걸 잠글 일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울고 싶을 때 참는 편이다. 슬픈 노래를 들어도, 슬픈 드라마를 봐도, 슬픈 소설을 읽어도 눈물이 나오려는 걸, 침을 한 번 꼴깍 삼켜서 참으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문득 왜 그래야 하는지 나조차도 의아해진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인데, 내 감정을 나 혼자 느끼고 있는 중인데도, 굳이 남을 의식한다.
눈물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 건 남자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영화관에서도 눈물을 애써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옆에 앉아 있는 일행들에게 들킬까 봐 영화의 감성에서 빠져나와 "아 울면 안 되는데." 하며 내 눈물로 관심이 집중되어 버리기도 했다. 자주 그랬다.
많이 울고 나면 눈물을 그친 뒤에도 "흐흐흑"하며 숨이 몰아쉬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아이를 혼내고 나서 잠이 들기 전에 나는 분명 울지 않았는데도, 그런 호흡을 할 때가 있다. 엉엉 울다 잠이 든 아이를 뒤에서 조금 안아본다. 내 손보다 아직 반이나 작은 손가락을 쫙 펴서 깍지를 껴본다. 그래도 눈물은 나오지 않지만 너무나도 울고 싶어 답답한 순간들이 있다.
아이는 자면서도 "흐흐흑"하고 숨을 몰아쉰다.
아이를 혼 낼 일도 아니었다. 말로 다독이고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혼을 내서 엉엉 울려버린 건 아직도 나에게 엄마 자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내가 하는 일중에 가장 버거운 일이 엄마 노릇이다. 그리고 밀려드는 자괴감 때문에 울지도 않았는데, 몸속에서는 "흐흐흑"하고 숨이 몰아쉬어진다.
눈물을 또 참고 나니 수도꼭지가 꼭 동파될 것처럼 가슴도 답답하다.
운이 좋게도 동파가 된 적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파트가 오래되고 노후된 주택일수록 쉽게 고장 나고 부서지기 마련이므로.
사람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졸졸 흐르는 동파방지 수돗물처럼 무엇인가를 졸졸 흘려보내야 하는 순간 말이다.
오히려 이십 대나 삼십 대에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을 참기에만 급급했다. 내 눈물을 남이 보는 게 그렇게도 창피하고 싫었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참다가 터져버리는 수도꼭지 꼴은 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비교의 주범은 동네 아줌마가 아닌 온라인이다. 단톡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자랑거리들로 인해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스마트폰을 멀리하기로 결심한다.
나에게는 이것이 졸졸 흘려버리는, 조금은 아깝지만 나를 살리는 동파방지 수돗물 같은 것이다.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려야 하는데, 비교와 질책이 울지도 않은 나를 "흐흐흑"하고 울리려고 해서 문제다.
동네 아줌마들과도 멀어지고 단톡방과도 멀어질 결심, 고립될까 걱정도 들지만, 아이를 울리는 나쁜 모성애가 자꾸만 드러날 바에는 흘려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어쩌다 보니 단톡방이 여러 개다. 개중에는 내가 시작한 아이의 학습 관련 단톡방들도 몇 개가 된다. 보다 보면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되는 내가 싫다. 엄마들의 자랑거리로 도배되는 단톡방에 들어서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자랑이 아닌 듯 자랑하는 걸 보고 있자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도 갑자기 쭈구렁뱅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곳에서 도망가고 싶은데, 방도가 없다. 보지 않을 결심을 할 수밖에.
수도꼭지가 터지기 전에 도망친다. 그리고 오늘은 아이를 울리지 않을 결심을 한다. 그게 나의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