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인 둘째 아이와 하교 후 늘 놀이터에 간다. 1학년 하교 시간의 놀이터는 북새통이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바글거리고 그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해맑기 그지없다. 학원시간에 늦을까 봐 30분만, 40분만 놀아야 한다는 엄마들의 외침 속에 10분만 더, 를 주장하는 꼬마들은 제 엄마들과 실랑이를 하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놀이터에서 둘째 친구 엄마들과 의도치 않게 자꾸 대화를 하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 새언니가 둘째를 입학시키고 엄마들과 대면하기 싫어서 아이를 바로 태권도차에 태워 보냈다고 했을 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우리 가족 중에 최고의 외향형인 새언니조차도 그런 일들의 무의미함을 나에게 알려주려고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큰 아이 때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럴 일이 없었는데, 아이를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은 단순히 '아이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그만 놀고 싶을 때까지, 놀이터의 최후의 아이로 이미 엄마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듣고 정말 놀랐다. 안보는 것 같아도 남의 아이, 다른 엄마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관심 없는 건 나뿐이었나. 그러다가 아이들 학원을 보내지 않는 나에게 한 엄마는 궁금증이 동했나 보다.
"잠수네 아시죠? 학원 안 다니면 잠수네로 영어 많이 보여주세요. 잠수네 효과 좋아요."
나도 잠수네 유료회원인데, 그냥 알은체하고 싶지 않아서 네 하고 미소만 보내줬다. 잠수네 공부법이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몇 년 해보니 나에게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잠수네에서도 열성적인 엄마들이 많다. 포트폴리오 작성하고 영어교실 수학교실 레벨테스트 하고 도서관에 매일 가고. 나는 그 정도의 열정은 없다. 좀 편하게 키우고 싶을 뿐이다.
"큰애가 3학년이죠? 큰애는 이미 늦었고, 둘째는 이제 시작하면 될 거예요."
큰애는 이미 늦었고???
아니 뭐 이런 소리를 다 듣게 되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몹시도 묘해졌다. 우리 큰 아이를 본 적도 없으면서 큰애는 늦었다니, 어디가 어떻게 늦었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학부모 총회가 있던 날 교문 앞에는 어린이 학습지 판매원분들이 진을 치고 계셨다. 화려한 장난감으로 아이들을 유혹하셨는데, 총회 끝날 때까지 가 있을 곳이 없던 아이는 도서관에 잠시 머물렀고, 끝나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는 주변에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다들 학원에 가있을 시간이라서 엄마들이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나 보다. 나중에 들었는데 같은 반 엄마들끼리 끝나고 커피 한잔씩 했다고 한다. 살짝 소외감이 느껴지다가 안도했다. 아이 덕분에 그런 자리에 안 낄 수 있었다는 기분이었다.
밀크티(어린이 패드 학습지)에서 나오신 판매원분께서 아이에게 장난감을 보여주시니 애는 가져가고 싶다고 난리였다.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애기야 가져가도 돼. 여기 연락처만 좀 적어주세요."
"아니요. 안 해요."
"일주일만 해보시고 결정하시면 돼요. 바로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이가 너무나도 보채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따끔하게 혼내고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놈의 체면이 뭐길래.
황급히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주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며칠 후 밀크티 기계가 도착했다.
패드 학습은 전혀 할 생각이 없다. 문제집 한 장도 안 푸는데 패드로 학습을 할리 없었고, 그걸 하자고 시작하면 의무가 되어서 닦달할 것이 뻔하기에 절대로 학습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패드가 도착한 후 밀크티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는 지금 숫자를 백까지 셀 수 있나요?"
"네."
"한글은 다 떼었죠?"
"아니요. 읽을 수만 있어요."
"아... 읽을 수만 있다. 그럼 덧셈뺄셈은 하나요?"
"한 자릿수 덧셈만 하고 있어요."
"뺄셈은 안 해요?"
"네."
"1학년때 뺄셈 나오는 거 아시죠? 덧셈 나오고 뺄셈 나와요. 지금 안 하면 큰일 나요. 다른 애들은 곱셈도 하거든요."
학교에서 배우면 되지, 큰일은 무슨. 1학년이 굳이 곱셈은 왜, 가르기 모으기만 잘하면 되죠,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네네 거리기만 했다.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듯 하니 갑자기 그분은 목소리 톤을 조금 더 높이더니,
"하루에 학습량은 몇 분으로 정할까요?"
"5분?"
"네???"
"5분이요."
"하.. 5분은 너무 짧은데요."
"저는 공부시킬 마음이 없어요. 아이가 5분 이상 집중도 안되고요."
"하.. 한자는 시작하셨죠?"
"아니요."
"네... 하.. 일단 로그인을 해주셔야 진도를 넣어드릴 수가 있으니 꼭 로그인해 주세요."
전화를 끊으면서 그분은 내가 계속 진행할 의지가 없음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결심이 막 흔들리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밀크티 선생님에게 굉장히 혼꾸녕이 나버려서 갑자기 부진한 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열심히 잘 놀고 잘 자라는 아이들을 졸지에 늦은 아이, 뒤처진 아이, 큰일 날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1학년 때 곱셈하면 뭐, 달라지나요, 세상 살기 편해지나요, 아니잖아요.
역시 사교육은 학부모의 불안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았다. 엄청난 불안감을 조성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더 된 밀크티는 박스채로 현관 앞에 놓여있다. 일주일 체험기간이 지나면 그대로 반품을 할 생각인데 왜 반품하라는 연락이 없지. 또 불안하네.
동네 아줌마는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공부로 먹고사는 세상도 아니고, 지겨워서 더 이상 못 놀겠다고 할 때까지 놀릴 거다. 나는 깜깜해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노는 엄마로 남겠다. 이 동네 이상한 엄마로 소문나겠지. 유명해지는 건가.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