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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un 01. 2023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 받았지만

며칠 전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온 아들은 자기 누나가 하교하자 윗집 누나까지 셋이서 또다시 강아지를 산책한다는 명목으로 바깥으로 향했다. 하루에 3시간은 밖에서 노는 것 같다.

놀이터에서 만난 한 엄마는 나에게 "이호는 놀이터 지킴이 같아요."라고 했고, 다른 엄마는 "이호 엄마는 힘들겠어요. 삼계탕이라도 사 드세요. 기력 딸려서 전 그렇게는 못 있어요."라고 했다.

나의 팔은 새까맣게 타서 없던 햇빛 알레르기라도 생긴 마냥 오돌토돌 일어나 버렸고, 어제 저녁에 나는 팔토시를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비타민디는 풍부해졌겠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버틴다.


1시부터 3시까지는 기본이고 4시나 어느 날은 5시까지도 논다. 그나마도 자기 스케줄이 아닌 누나의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간다. 어쩔 수 없다고는 했지만 아이는 사실 조금 지겨워진다. 놀이터에서 놀다 놀다 지겨워서 집에 가는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내 아들이다.

심지어는 놀잇감에 하도 매달려서 여덟 살 아이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굳은살이 생겼다길래 응? 그런 게 생길 리가 있나, 했는데, 원인은 놀이터에서 2시간씩 매일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굳은살의 원인을 깨달은 순간, 강수진의 발가락과 이상화의 발바닥 사진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피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굳은살이, 놀이터 지킴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들손바닥에 떠오르다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강아지 산책을 다녀온 아이는 "엄마"하며 나에게 주먹을 내민다. 주먹 안에는 봉오리가 막 피어난 작은 장미하나가 들어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주워왔어."

이건 뭐, "오다 주웠다"도 아니고, 아들에게 바닥에서 주운 꽃 선물은 몇 번 받아봤지만 장미는 또 처음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엄마가 물에 담가놓을게. 여기 이렇게 담그니까 예쁘다."

'수요일엔 빨간 장미'라는 진부한 표현은 나에게는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남자친구도 아닌 아들에받은 빨간 장미는 이렇게 나의 추억창고 한 켠에 쌓인다.


놀이터에서 체력을 열심히 소진하고 집에 오는 아들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숙제도 열심해했다'는 해피엔딩에 다다르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밥도 잘 안 먹고, 구몬도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 안 하고 만다. 그나마 학교 숙제로 가지고 오는 수학익힘책은 어르고 달래서, 어느 날은 매섭게 혼내고 소리 질러서 겨우겨우 풀어간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 다녀오고 학원 숙제에 학교 숙제까지 잘하는데 우리 아들은 왜 이럴까, 고민이 깊어지는 초등입학 후 3개월이었다. 작년까지는 무척 순해서 누가 무슨 걱정하면 "이호가요? 에이, 저는 걔 걱정은 안 해요. 일호가 걱정이죠." 그랬는데, 역시 아이들에 대해서는 장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를 힘들게 만들던 일호는 이제 제 할 일을 징징대지 않고 해내는 편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나고 있을 텐데, 오늘 하루의 한숨이 깊어 나는 또 소리를 질러대고 마는 못된 마녀 엄마가 되었다.


빨간 장미를 나의 손에 놓아주었던 아들은 그날 저녁에도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폭발해 버린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나는 누가 나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면 그게 며칠 동안 생각나고 심장이 얼어붙던데, 매일매일 소리 지르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은 어떤 심정일까. 내 마음이 평온할 때는 자기비판과 자아반성을 하다가도 또다시 아들의 짜증과 못난 모습을 마주했을 때에는 나는 다시 화를 내고 만다.


아들보다 딸이 더 힘들어요. 저는 딸하고 더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런 말들은 이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냥 애마다 다르고 엄마마다 다른 걸로.

에너지를 그렇게 빼는데도 왜 아이의 짜증은 더욱 심해져 가는지, 장미를 손에 받아 들고 헤벌쭉하던 엄마는 그날 저녁 동네 신경정신과를 검색해보고 만다.

그러고 보니 딸이 여덟 살과 아홉 살일 때에도 신경정신과를 검색해 봤었다.

약이라도 먹어야 아이에게 화를 덜 낼 것 같아서. 문제는 엄마인 나라는 걸 잘 알지만 육아가 너무 힘이 들어서 나는 오늘도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하지만 사춘기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끔 나를 소름 돋게 한다. 아마도 그때는 정말 신경정신과를 찾게 되지 않을까. 그전에 내가 더욱 단단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의 손바닥에 생긴 굳은살처럼 내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겨 좀 의연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일거라 생각해보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 마음에 굳은살이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오늘은 아들에게 장미같은 하루가 펼쳐지길,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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