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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un 05. 2023

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지 않기로 했다

나이를 먹으니 생일이 뭐 별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생일이라고 아는 채를 당하는 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카카오톡에 생일 알람은 꺼놓고 산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내 생일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멀리 사시는 시부모님들은 특히 더 잊고 지나가시길 바란다. 하지만 그분들도 입장이라는 것이 잊기에, 당일 잊더라도 며칠 지나 연락을 주시곤 하신다. 깜빡 잊었다, 미안하다며. 하지만 전혀. 

전혀 서운하지 않다.


남편과 나의 생일은 5일 차이다. 내가 먼저고 5일 후에 남편의 생일이 있다. 그래서일 거다. 남편은 내 생일을 잘도 기억한다. 나는 왜 남편도 자식들도 내 생일을 모른 척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진심은 아닐 거라는 건 안다.

대체로 나는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 인간이란 대부분 독립적이어서 누가 시키는 일은 하고 싶다가도 하기 싫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더욱 그렇다. 

은근히 나에게 멋짐을 뽐내면 나도 해볼까 슬쩍 묻어가지만, 대놓고 내 앞에서 자랑질을 해대면 반감이 들어서 절대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진 나니까, 생일이라고 형식적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가 참 불편하다. 남들과 어울려 사는 데에 이토록 서툰 중년이라니. 


생일이 되면 역시나 우울해지고 만다. 이런 우울감이야말로 내 생일이 별거 아닌 게 아니라는 내 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생일이라는 날은 별거 아닌 그냥 평범한 하루일 뿐인데 말이다. 

일 년 내내 자기 생일에 뭘 받을지 고민하는 우리 집 두 아이들과는 다르게 나는 갖고 싶은 것도 없고, 기대도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삐딱선을 타는지, 유연하고 둥글게 살기가 참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살을 더 먹었는데, 나는 오히려 퇴화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일들을 적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이렇게 대했으니까, 나도 저 사람에게 이 정도만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을 갖고 싶어서.

"도리만 하라"라고 한다. 그 도리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나에게 하는 만큼만 할 수 없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잘해야 하는 관계들. 그런 관계들이 부담스럽다. 

일터에서는 눈치 보느니, 내가 일을 더 하고 만다. 그게 속이 편하다. 어느 해, 갑자기 휴직하신 분의 일을 두 개로 나눠서 떠맡은 적이 있는데, 관리자에게 불려 가고 보니 나처럼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는 분이 앉아 계셨다. 분명 "싫은데요."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분이셨다. 아마 나도 그들에게 그렇게 보여서 그곳에 앉아 있었겠지. 하지만 일을 더 많이 떠안게 된 그때에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그냥 해버릴 뿐이고, 왠지 이걸로 내가 적립금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네, 하는 사람이 호구가 되는 줄은 그때는 진정 몰랐는데, 사실 지금도 그게 호구라는 생각이 안 든다. 일할 때는 호구가 되어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남들이 해야 할 일을 괜히 더 떠안으면 기분이 좋기까지 하다. "내가 해주니까 고맙지?" 하는 마음이 내 속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반골기질에 변태기질도 있다.

이런 면들이 가깝고 사적인 관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나한테 실수하거나 미안해해야 하는 일들을 빌미 삼아 우위에 서고 싶나 보다. "남편, 이번 생일 모르고 지나갔으니까, 나한테 절절매도록 해."라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싶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음흉하다."라고 했던 말이 진짜인 것만 같다. 나는 참 음흉하고 삐딱하다.



순수의 시대는 지나갔다. 나는 음흉한 중년이 되어서 변태적으로 남들에게 가학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생일이면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축하받고,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던 어리고 젊은 시절이 이제 나에게는 사라져 버렸다.

아줌마 생일이 뭐가 중요하겠어,라는 자기 비하를 즐기면서도 그만두고 싶어지는 모순덩어리 중년이 되어버려서 조금 슬픈 생일이다.

어쩌면 결혼하고 신혼 첫 해를 제외하고는 내가 내 손으로 끓여 대던 생일 미역국을 끓이지 않기로 다짐한 일이 나름 내 생일을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조용히 지나가고 싶은 마음은 제발 나 좀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한 끗 차이다. 

여전히 나는 나이만 먹은 미성숙한 인간이다.



생일이 아닌 어떤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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