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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un 10. 2023

며느리라는 종속관계

시가에 다녀오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 마음은 나의 못된 마음의 발현이다.

얼마 전부터 '시댁'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시가'라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남편이나 시가 시구들 앞에서는 '시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냥 어머님댁이라고 하면 되니까 굳이 시가라는 말을 쓸 일도 없어 다행이지만.


사실 어머님은 좋은 분이시다,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사실 김 부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사실 최 과장도 알고 보면 그렇게 악질은 아니더라고."

"사실 정 사원이 나쁜 애는 아니야. 잘 몰라서 그렇지."


나도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인 적이 있을 테고, 나에게 좋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악질일 수도 있다. 그냥 상황이 그런 것뿐이다.

특히 며느리라는 자리는 어른들에게 아직도 '우리 집으로 일하러 온 애'라는 개념이 있는 것 같다. 나쁜 며느리는 없다. 다른 며느리가 있을 뿐.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시가가 두 개다. 하나라도 싫은데 두 개라니. 하지만 다행히도 남편의 중재 덕분에 아버님 댁에는 가지 않는다. 결혼 전에는 아들을 부르지 않던 시아버지께서는 결혼을 하자마자 명절에 와서 일하라는 말을 하셨으니, 그분의 사고방식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편이 가야 한다고 했어도 나는 가지 않았을 테지만 뭐.

그런데 시어머니께서도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신다.

"야, 너 내가 이혼 안 했으면 그 제사고 뭐고 다 했어야 돼. 육 남매 맏며느리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는 그거 안 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이니."

안다. 어머님은 진심으로 내가 안 해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원래 그런 걸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서 엄청 감사하지는 않다. 그게 과연 감사해야 할 일인지 의문이다. 남의 집 제사를 내가 왜?


왕래가 없는 남편의 친가 친척들과 결혼 십 년 만에 만날 일이 있었다. 음식을 치워야 하는 걸 잊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처음 뵌 남편의 고모부인지 작은 아버지인지(정말 누구신지 모른다. 아무도 나에게 소개를 해주시지 않고 나와 인사도 나누지 않으셨기에) "야 빨리빨리 이거 치워라. 야 너네 일어나서 이거 치워라."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나를 지칭하는지 몰랐다. 그 자리에 손님으로 앉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손님이 될 수 없는 법이거늘.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스크 속으로 입말을 중얼거리며 남들이 먹던 음식을 치웠다.

나는 손님이 아니었다.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디 감히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는가.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거의 5년을 명절에 와서 일하라고 간간히 말씀하셨다. 나는 명절에 시어머니댁에 간다. 그곳에서는 거의 일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머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먹고 같이 치우는 정도. 아이들을 돌보고 어머님과 수다를 나눈다. 하지만 나도 엄연히 시가에 가서 명절을 지내는 며느리이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내가 명절에 시댁에는 오지 않는 막장며느리라고 생각하신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마치 코끼리를 설명하는데 누군가는 다리를 보고 두꺼운 원통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코를 보고 가늘고 길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기분이다. 절대로 의견이 합쳐지는 일은 없다.


왜 여자는 남의 집에 가서도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깊은 밤, 결혼을 했던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잠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발현된 것인지, 나는 유독 딸보다 아들에게 숟가락을 놓으라고 말하곤 한다.

"가족 일은 같이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제 누나보다 자기를 더 시키는 아들이 불만을 품게 될까? 조금 더 크면 쓰레기도 버리라고 시키고 청소기도 밀라고 시켜야지, 하면서도 딸은 자기 방 정리만 시킨다. 그것도 안 하면 그냥 둔다. 언젠가는 하겠지 하며. 이것도 역차별일까.


상황이 되는 사람이 아무나 해도 되는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 며느리라는 종속관계를 벗어던지고 설거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하고, 못하는 사람은 앉아서 쉬면 되는 거고.

엄연히 말하면 며느리는 손님이다. 사실 결혼한 자식들은 모두 손님이다. 하지만 손님이라고 먹고 놀기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손님 대접을 한다면 기꺼이 손님으로써 자기가 앉은 자리정도는 정돈하는 것이 또 사회적인 규범 아니겠는가.

설거지 못하는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라면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자기가 치우길 바란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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