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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Jul 01. 2023

집순이 맞춤시대

이십 대 때 패기와 로망 하나로 여름마다 해외로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번 해외에 나가면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짧게 짧게 여러 나라를 훑고 지나왔다.

여행은 준비할 때 가장 설레었고, 공항 가는 길까지가 가장 좋았다.

나는 늘 다른 나라에 도착해서 공항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인천공항이 그리웠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 그런 건 아니라는 걸 4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뭐든 느린 나는 역시 나를 알아가기도 느리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의 관광지와 유명한 곳은 모두 가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부터 깨어나 밤중에 숙소로 돌아오는 강행군이 여행의 당연한 일정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행지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 풍경만 하루종일 바라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다. 함께 여행하는 일행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치열하게 관광해야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한다는 건 바지런히 걸어 다니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단순한 로망을 실해 보려는 마음이었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의 감사함을 한껏 이용한 것뿐이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나의 내면에 어떤 울림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코로나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온라인 모임", "비대면 강의" 같은 것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라서 나로서는 생각해보지 않던 것들을 해볼 수 있는 지금이 호시절이다.

특히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독서모임을 비대면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집에서 시간 맞춰 컴퓨터 화면만 켜면 되니까 나갈까 말까, 옷을 뭐 입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지역 주민이 아닌 전국구의 회원들 덕분에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개인적인 사적 대화보다 양질의 이야기로 시간을 알뜰히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모임들이 나에게 너무나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집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나 같은 집순이들에게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비대면의 세상이 솔직히 좋다.

사람의 온기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 정도의 온기가 딱이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관심.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한 달에 한번 화면으로 만나는 그들은 서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어디에 사는지, 아이들은 몇 살인지, 직업이 뭔지,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더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약간의 익명성과 약간의 거리감이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문제는 그러하다 보니 오픈채팅방의 숫자가 날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카톡창이 일반채팅과 오픈채팅으로 나뉘면서 나의 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반 채팅창에는 "남편" 이외의 사람들이라고는 우체국, 즉석반찬, LG전자, 마켓컬리, 민음사 같은 온통 광고광고광고뿐이다.

그나마도 남편을 상단에 고정해 놨으니 보이는 거지, 고정을 해제하면 남편과의 채팅방도 매일 저 밑으로 내려간다. 나에게 연락 주는 많은 광고업체들과 온기가 훈훈한 오픈채팅방.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로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간인가 싶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기도 잠깐, 나 같은 집순이가 그나마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게 좋기만 하다.

스티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 덕분에 히키코모리가 될 뻔한 인간도 나름 사회적인 인간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역시 인류는 0.1%의 천재들 덕분에 살아가지나 보다.

나는 천재가 아니고 영재도 아니고 수재도 아니니까 나머지 99.9%의 인간으로서 그런 혜택들을 열심히 받아먹으며 방구석에서 글을 쓰고 사유를 해본다. 어쨌든 이과 인간들에 의해 세상은 편해졌지만 사유하고 철학하는 문과 인간들이 없었더라면 올바르게 나아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독서모임하다가 철학의 숲에 잠시 빠졌던 문과 인간도 아니고 이과 인간은 더더욱 아닌 나라는 존재도 언젠가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끄적여놓고 떠날 수 있는 이 시대의 문명이 좋다.

뭐, 그 정도의 사유와 철학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의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생각하고 배우고 소통하는 99.9%의 인간이 되어 인류에 0.000000001% 정도 기여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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