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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Jul 11. 2023

잘난 척도 소질이다

교실에 있다 보면 잘난 척쟁이들을 종종 본다. 그들은 본인이 잘난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 애들이 잘난 척을 해서 싫다고 한다.

어떤 어린이는 굉장히 잘났지만 그다지 척을 하지 않아서 더욱 잘나 보이기도 한다. 고작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들이지만 존경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는 날에는 "엄마가 누구시니"소리가 절로 나온다.

잘난 척을 잘난척하지 않고 하는 방법이 있을까.

잘난 척이 척이 되는 경우는 아무래도 그게 진짜 잘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경우가 많다.

정말 잘난 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잘나 보이고 못난 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까 척이라도 하는 것이겠지.


그들의 잘난 척을 보면서 내가 기분이 상하는 것은 사실 나도 그걸 갖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보다 더 잘났다면 그들의 잘난 척이 귀여워 보였을 것이다.

결국은 잘난척해서 싫어요,라는 말은 내가 그만큼 못난다는 말이 되고 마니,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다.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슬아 작가를 계기로 에세이에 입문했다.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뭐가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같은 상황이라도 맛깔나게 쓰는 작가의 글을 보면 키득키득거리게 된다.

그런데 어떤 글은 읽다 보면 불편하다. 왜 이렇게 잘난 척이야,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그 글은 마음에서 멀어지고 만다. 

나는 그런 글을 쓰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텐데, 혹시 잘난 것도 없는 내가 잘난척하는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발행버튼을 누르지 못한 서랍 안의 글들만이 무수히 쌓여간다.


이건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서 아무도 안 궁금해할 거 같은데, 이건 너무 뭔 소린지 모르겠어서, 이건 너무 누구 욕하는 거 같아서, 이건 너무 없어 보여서. 


대체 작가들은 뭐 하는 작자들인지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걸까. 잘난척하지 않고 웃으며 에세이를 쓴다는 게 쓸수록 대단하게 느껴진다.


여덟 살들의 교실에서는 "야 너 이거 못하지."따위의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도 오고 간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어린이는 "아니야. 할 수 있어." 하고 응수하곤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둘 다 못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둘 다 자기는 잘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포인트다. 그래서 서로 자기는 잘한다는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상대방이 잘난 척을 해서 재수 없다고 느끼기에는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별로 재수가 없지 않다.

열두 살쯤 되어야 "00 이는 너무 잘난척해서 재수 없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정말 그 애가 재수 없는 건지, 내가 못나보여서 속상한 건지 마흔이 넘은 나도 가끔은 헷갈린다.


내가 말주변은 없어서 글 주변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운 오늘 같은 날에는 나도 뭐라도 잘난 척을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또다시 절망스럽다.

주로 자녀교육서나 자기 계발서를 읽다 보면 뭔가 꾸중 듣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한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그걸로 자녀 교육서를 낸 작가들의 경우에는 "우리 애는 안 그런데?"라는 의문 투성이로 끝나버리는 글들을 읽다가 결국 우리 애가 못난 걸로, 내가 못난 걸로 결론 내어지는 게 참 싫다.

자녀교육서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다니. 

오늘도 누군가의 자녀 교육 이야기가 너무 잘난 것 같아서 슬퍼졌다. 잘나서 잘났다고 말하는데 슬퍼지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그건 내가 못나서다. 오늘도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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