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하고 돌아온 아이의 책가방을 뒤지는 재미가 있다. 어떤 날은 꼬깃꼬깃 색종이들이 쓰레기가 되어 들어있고, 어떤 날은 학교에서 만든 작품(?)이 널브러져 있으며, 어떤 날은 수학 학습지 뒷면에 알 수 없는 낙서가 암호처럼 적혀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라고 매일 말하지만 아이는 도서관에 도통 가질 않는다. 점심시간에만 갈 수 있는데 점심시간은 친구들과 놀아야 하므로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다는 게 그 아이의 논리다. 일리가 있어서 할 말이 없다.
그러다가 가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온 날은 자랑스레 말하는데, 사실 아이가 입학하고 처음 빌려 온 건 그림책도 아니고 동화책도 아닌, 청소년 소설이었다. 보기에 두께도 제법 있고, 글씨만 빼곡한 게 딱 "엄마책"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엄마 책 읽으라고 빌려왔어." 하며 나에게 책을 내밀었는데,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몇 장 읽다가 반납해 버렸지만 제 책은 읽지도 않는 놈이 엄마 책 좀 읽으라고 빌려왔다는 게 과연 나를 위한 건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책가방을 열었는데 누런 책이 보였다. 또 내 책을 빌려왔나 싶었는데 웬걸, 무려 해리포터. 그것도 영문판을 가져온 게 아닌가. 그래도 아무거나 뽑아 든 건 아닌 모양인 게, 1권 마법사의 돌을 잘도 빌려왔다.
"이호야. 이게 뭐야. 해리포터잖아. 하하하하하 근데 너 이거 못 읽잖아. 이건 나도 못 읽어. 한글로 읽어도 이해가 안 갈 텐데. 왜 이걸."
"태우가 재밌다고 했단 말이야."
"그래. 태우는 읽을 수 있다고 하던데(솔직히 믿기는 어렵지만). 너는 아직 못 읽잖아."
"엄마가 읽어주면 되지."
그렇겠지. 당연히 한글책도 내가 읽어주는데 영어책을 네가 읽겠니?
아. 근데 종이는 누렇고. 글자는 빼곡하고 보기만 해도 읽기 싫게 생겼다. 그리고 해리포터는 한글로 읽어야 제맛이지, 단어 찾아가면서 읽게 생겼니.
내가 해리포터를 좋아하지만 32살에 완독을 했다. 당시 엄청 해리포터에 빠져서 굿즈도 사고 그랬지만, 지금 너는 8살인데?
엄마들 사이에서 초등 고학년이 되면 해리포터 원서를 읽게 되는 것이 영어의 목표 정도 되는 것 같다. 초등 고학년에 한글판 해리포터만 깔깔거리면서 읽어줘도 나는 소원이 없겠다. 그래도 원서를 읽게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의 우리 두 아이를 보면 그건 아주아주 요원한 일이다.
엄마표 영어의 과정은 너무나도 지난하여 매일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오늘은 안 읽어주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 귀찮음과 효과에 대한 의문을 가득 품은 채 매일 읽어주는 삶이 만으로 8년이 넘었으니 이 정도면 뭐라도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 게 아니냐며 또다시 포기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달리기도 단거리보다는 장거리를 상대적으로 잘하는 내가 아닌가. 읽어주는 삶이 몇 년이나 더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초등학교 입학하면 안 읽어줄 줄 알았다.
10살 딸도 매일 읽어주고 있으니 도통 읽기 독립은 언제 되는 거냐고 전문가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애마다 달라요."
요즘 나는 청소년 소설에 심취해 있다. 특히 이꽃님 작가의 책이 너무 사랑스럽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죽이고 싶은 아이"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이꽃님 작가의 책은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을 아껴서 읽고 있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유치하고 찬란한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이 행복하다.
그리고 이런 책을 아이가 읽을 때까지도 같이 읽어주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그런데 설마, 진짜로 이런 책을 읽을 때까지 읽어달라고는 안 하겠지? 설마.)
책육아나 엄마표 영어를 아주 체계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되는대로 될 대로 돼라 하면서 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이 만족스럽지 않다. 아직도 아이들은 자발적인 독서가가 되지도 못했고, 도서관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영어 영상 보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의 최고 즐거움은 뛰어노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춘다. 유튜브에서 말도 안 되는 영상을 찾아보고 또 춤을 춘다. 핸드폰도 사줬고, 주말에는 게임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육아니 엄마표 영어니 자랑할 거리가 없다.
그런데 뭐, 애마다 다른 거니까. 안 그런가?
그래도 어쩌다가 영어로 캐치티니핑과 브래드 이발소를 깔깔 거리며 시청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벌써 서울대에 입학시킨 마냥 뿌듯하다.
영혼을 잃어버린 채 책을 읽어줘서 나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몇 달 뒤에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또 빌려오면 "이거 읽은 건데 또 빌려왔어?" 하면서 "그래도 읽어줘." 하면 영혼을 잃은 건 나뿐이라서 다행이다.
여름방학도 다가오는데 아무런 계획도 없고 그냥 늦잠 자고 일어나서 자전거 타고 춤출 생각에 신나 있는 아이들이라 해도 언젠가는 해리포터도 읽고 언젠가는 외국인과 대화도 할 수 있는 아이가 되겠지. 매일매일 읽어주고 매일매일 영어영상을 보면 즐거운 삶을 살겠지. 서울대에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헛된 상상도 해본다. 뭐 상상은 자유니까.
그리고 너는 지금 행복하다고 하니까. 행운이 너에게 다가가는 중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