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아이 두 명에게 들어가는 돈이 가장 많다. 아이들 학원비(그래도 초등 2명 키우면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하니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가), 간식비, 그 외 아이들이 원하는 잡다한 것들(큐브, 다이어리, 예쁜 볼펜 등) 아이들도 지난주부터 용돈을 주기로 했는데, 용돈을 홀랑 써버리는 첫째 아이와, 그동안 할머니들께 받은 것까지 차곡차곡 모아서 비싼 큐브를 사겠다고 당당히 자기 돈을 지불하는 둘째 아이. 자기가 모은 용돈이니까 이 비싼 걸 사줘야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뭐가 정답일까?
차라리 홀라당 써버리고 남은 기간 동안 쫄쫄 굶고 있는 첫째가 나아 보일 지경이다. 정말 뭐가 정답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절약이 몸에 베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옷이나 물건을 살 때면 죄책감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잘 나오는 텔레비전을 더 큰 걸로 바꾸던 어느 날, 쉰이 넘은 아빠가 아빠 돈으로 바꾸는 건데도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대체 누구에게 죄를 지은건지도 모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내 심리상태가 정상은 아닌 듯싶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받아온 가정교육 탓이 컸으리라. 아직도 친정집에 가면 뭐 하나 버리지를 않고 죄다 쌓아놔서 지저분하기 그지없는데, 내가 뭘 좀 버리려고 하면 엄마에게 욕을 먹기 일쑤다. 하지만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9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욕실에 개샴푸가 놓여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엄마는 "나중에 다 쓸데가 있다"며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그거 쓰면 피부병 걸려서 돈이 더 들 텐데.
물건을 사고 버리는데 죄책감이 사라진 건 아마도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80~90만원을 벌면서도 그 돈이 한 달 만에 다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했지만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 죄책감은 부모의 돈을 쓰는 데 있어서 오는 일종의 심리적 부담감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내돈내산에 거리낌 없이 살게 되었다. 그러니 뭐든 독립이 중요한 모양이다. 몸도 독립을 해야겠지만 경제적인 독립, 정신적인 독립. 역시 인간의 완성은 독립이다.
이런 걸 마흔이 넘어 알고 깨달아간다. 백세시대니까 괜찮아,라고 하면서도 조금 아쉽긴 하다. 스물에 알았다면, 서른에 알았다면. 그런 후회들 말이다.
이제는 삼십 대 엄마들을 보면 그렇게 젊고 예쁠 수가 없다. 그리고 부럽다. 뭐든 할 수 있잖아, 내가 그 나이였다면 정말 벌써 책 여러 권 썼겠다, 따위의 근거 없는 생각들이 든다.
작년 브런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올해에는 책 한 권 내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고,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글들이 난무할 뿐이다. 어느 것 하나 마무리되지 않고 벌려놓은 일들이 산재한 느낌이다.
가계부를 쓴다고 내가 부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나를 알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내가 이런 걸 샀구나, 내가 이런데 돈을 쓰는구나.
하루일지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이런 욕망이 있구나.
그렇게 나는 글을 쓴다. 소설을 쓴다고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던 며칠 동안 내 마음이 왜 불편했는지 알 것 같다. 소설도 진도가 안 나가는데, 브런치도 멈춰있으니 내 삶이 멈춘 듯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지난주 나의 가계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아이들의 학원비였다. 줄넘기, 영어도서관, 피아노, 발레.
무엇하나 내가 가라고 등 떠민 거 없이, (솔직히 말해서 안 다니고 그만 다녔으면 좋겠는 것들 투성이다.) 자기들이 원해서 다니는 학원이니 즐겁게 갔다 오길. 라이딩하느라 하루에 만 오천보를 찍는 늙은 엄마는 덕분에 운동을 하게 되었다.
힘들다면 한없이 힘든 일이고, 즐겁자면 또 한없이 즐길 수도 있는 일들.
희생이라는 걸 딱 싫어하는 나니까 같이 성장하는 걸로 치자.
그러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만족할 정도는 되겠지.
가계부든, 하루일지든, 브런치든, 소설이든 계속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