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희는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나이가 드니 새벽잠이 정말로 없어진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더 자고 싶어서 이불을 끌어당겨보지만 정신은 더욱 말짱해진다.
젊을 때는 해보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새벽 산책이란 걸 한 번 해볼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지만 몸은 반응하지 않는다.
"에구에구" 몸을 일으키는데 입에서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는 일이 버겁지만 막상 출근을 하지 않는 방학 때면 심심해서 일도 없는 학교에 나가 괜히 교실에 멀뚱히 앉아있다가 오곤 했다.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부터 시작된 증상이다. 그렇게 살갑던 아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 제주도로 이사를 가버린 후, 정희는 마음 한끝이 항상 허전했다.
주변에서는 아들이 결혼해서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제주도에 산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동료교사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어머나 선생님 진짜 좋으시겠어요. 제주도에 자주 가실 수 있잖아요. 숙박비도 안 들고 너무 부럽다."
"맞아요. 심지어 아드님이 수의사잖아요. 비행기표도 끊어주시겠죠. 저희 학년 이번 방학 때 제주도에서 모이는 거 어때요?"
"아, 자기야 그건 너무 했다. 선생님 아드님 댁이 게스트하우스도 아니고 무슨."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정희는 농담인 듯 진담을 내뱉으며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에구. 그만들 해. 제주도는 무슨. 그게 아들집인가 며느리 집이지. 결혼하면 아들은 며느리 꺼야. 나는 그냥 혼자 사니까 속이 다 시원하고 편안해서 좋아죽겠어. 남의 신혼집에 내가 왜 가."
"어머 선생님. 멋쟁이 시어머니시다. 그 며느님 정말 복 받으셨네요. 그렇죠?"
가을에 출산예정인 옆반 조성지 선생님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이었다.
"성지쌤. 집에서 잡곡밥 해 먹나?"
"네 해 먹죠. 저 임신당뇨 경계라서 현미랑 잡곡밥만 먹고 있어요. 쌀밥은 거의 안 먹어요. 급식도 밥은 조금만 먹잖아요. 먹는 얘기 하니까 배고프네요. 하하하."
시원시원한 성격의 성지를 보며 정희는 우리 며느리도 저런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며느리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들 놀랄 것 같아서 그런 말은 어디 가서 하지도 못한다.
결혼 후 며느리 전화번호를 아들에게 물어봤다가 면박을 당한 후로 정희는 할 말이 있어도 아들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꾹꾹 참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수의대를 졸업하고 취업해서 3년간 모은 돈으로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정희는 아들을 정말 잘 키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있는 납골당에 가서 그러게 왜 이렇게 빨리 죽었냐며 약 올리듯 말하고 돌아올 때만 해도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속으로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어련히 잘 골랐을까 싶어서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며느리도 믿으려고 했다.
지난주에 성당에 같이 다니는 마리아 언니가 친정에서 잡곡을 많이 보내줬다며 한가득 나눠줬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아들에게 택배를 부치려고 전화를 했다.
"성재니? 잡곡 좀 보낼게. 너무 많아서 그냥 두면 다 썩을 거 같으니까 밥 해 먹을 때 넣어서 해 먹어라."
"엄마. 그런 거 안 보내도 돼요. 집에서 밥도 자주 안 해 먹기도 하고 제주도라 택배비도 비싸요."
"택배비가 비싸봤자지. 근데 왜 집에서 밥을 안 먹어.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밥을 먹어야지."
"여기 맛집도 많고, 올해 일 년은 시원이랑 맛집 탐방 다니기로 해서, 제주도잖아."
"그래. 재미나게 사네. 그래 시원이는 잘 지내지?"
"응. 지난주에 출판사랑 미팅한다고 서울 다녀왔는데, 말을 안 했네. 친정 가서 자고 어제 왔더라고."
"어.. 어. 그래. 잘했네. 알았다. 바쁠 텐데 끊자."
정희는 서울까지 왔다면서 지척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괘씸했지만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겠냐는 합리화를 해본다.
죽은 남편이 부쩍 생각난다. 그래서 늙으면 자식보다는 남편이 필요하다고 하던 친정엄마 말씀이 떠오른다.
"나도 엄마 보고 싶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정희는 엄마가 무척 보고 싶고, 남편이 그립다. 우울증인가, 심해지면 병원에라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아이들은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줄 맞춰서 오세요. 장난하지 말고. 뛰지 않아요."
건물 현관에서부터 교문까지 향하는 하교지도는 원래 3월에만 했었다. 그러나 학교 앞 횡단보도에 하교 지도를 해주는 어른이 한 명도 없으니 학교에서 해결하라는 민원을 받고 교장은 1, 2학년은 횡단보도 하교지도까지 교사들이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교장 저 자식. 교사가 하교하고 횡단보도에서 지도까지 하라는 건 어느 나라 발상이야. 저거 교대 때 내 공책 빌려달라고 빌빌거리던 게 교장 됐다고 어깨에 힘주고 말이야."
정희는 대학 동기인 교장과 독대해서 횡단보도 하교지도는 하기 힘들겠다며 총대매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교장은 학부모 민원이 너무 거세서 혹시 사고라도 나면 학교가 다 뒤집어쓴다, 교사들이 횡단보도에서 아이들 건네주면 모양새도 좋지 않으냐 하며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고, 들고 간 총대가 무색하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교장실을 터덜터덜 나섰다. 정희는 하루빨리 명퇴를 하던지 해야지, 하며 습관이 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5반까지 있는 1학년은 요일별로 돌아가며 하교지도를 하기로 했고, 오늘은 정희가 담당이었다. 사실 옆 반 성지선생님도 몸이 무거워서 대신해주고 싶지만 성지가 극구 사양했다. 나이 많은 자신이 대신해주는 것도 성지는 미안할 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지 같은 며느리를 들였어야 했다.
땀을 흘리면서도 병아리 같은 1학년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넘어져서 다칠까 봐 항상 노심초사다. 지난주에는 민구가 뛰다가 넘어질뻔한 적이 있어 가슴이 철렁하며 소리를 질렀다.
"민구야! 조심하랬지! 넘어질뻔했잖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문 밖 1학년 학부모들은 그날 오후 교무실로 전화를 걸어 1학년 3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너무 고압적이라는 민원을 잔뜩 넣었다.
언제부터 학부모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나이 많은 교사를 좋아하는 엄마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이 자기 엄마를 찾아가거나 학원 선생님을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정희는 횡단보도 앞으로 다가갔다. 들고 나온 교통안전깃발을 길게 뽑으며 횡단보도 앞에서 아이들이 도로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지난주에 전학 온 은비가 그 깃발을 빤히 쳐다보았다.
녹색신호로 바뀌고 아이들과 엄마들이 우르르 반대편으로 건너가는데도 은비는 건너지 않고 그 깃발만 쳐다볼 뿐이었다.
"은비야, 횡단보도 안 건너?"
"선생님 그거 뭐예요?"
"이거? 교통지도 할 때 쓰는 깃발이야."
"짧아졌다 늘어났다 하네요?"
정희는 은비가 귀여워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응. 이게 신기해?"
"짧은 게 더 아파요."
"뭐?"
"안녕히 계세요."
정희는 은비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전학 오던 날부터 주눅이 잔뜩 든 모습이 신경쓰였고, 일주일이 다 되어도 아직도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고 긴장한 모습에 다소 마음이 쓰였다.
땀이 뻘뻘 난 상태로 교실에 들어와 에어컨을 켰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서 에어컨을 되도록 틀리 말라는 교장의 말이 있었지만 정희는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럼 이 찜통더위에 여기서 쪄 죽으라는 거야 뭐야, 걔는 갈수록 꼰대가 되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뒷문이 빼꼼히 열리며 보건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어, 보건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하교지도 하셨나 봐요. 땀이.."
"하교지도한 거 너무 티 냈나? 하하하 나이 드니 땀이 너무 많이 나요."
"힘드시겠어요. 저기, 이 반에 김은비라는 친구 있죠?"
"네. 지난주에 전학 왔어요. 맞다. 1교시에 배 아프다고 보건실 갔었는데 금방 올라와서 괜찮다고 하던데요."
"네, 그런데 제가 배를 문질러주다가 옆구리가 살짝 보였는데, 멍이 잔뜩 든 거 같아서요. 다시 보려고 하니까 아이가 안보여주고 싶어 해서 억지로 보지는 못했어요. 혹시 가정환경이 어떨까요?"
"가정환경이 딱히 어떤지는 잘 모르겠던데, 첫날에도 엄마랑 같이 왔고, 아직 적응을 못한 거 같지만 낯설어서 그런가 싶어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도 한번 확인을 해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이 등을 봐야 될 것 같아요. 아동학대면 신고를 해야 할 것 같고요."
"그래요? 엄마랑 통화 한번 해볼게요."
"네, 수고하세요."
보건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에어컨이 이제야 가동된 듯 시원한 바람이 머리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정희는 긴 막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은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은비 엄마 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