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 엄마와의 통화는 5분을 넘기지 못했고 결국 오늘 은비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정희는 보건선생님이 보셨다는 옆구리의 멍자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혹시 아이가 어딜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는데, 은비 엄마는 며칠 전 이사하는 날 은비가 계단에서 굴렀는데, 아마도 그때 다친 부분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학 오자마자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하다며 안 그래도 내일부터 은비가족이 외갓집에 다녀와야 해서 가족동반체험학습을 신청하려고 한다는 엉뚱한 말로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가족동반 체험학습은 일주일 전에 미리 신청하셔야 해요 어머님. 갑자기 외갓집에 일이 있으신가요?"
"네, 갑자기 은비 외할머니가 아프셔서 제가 가봐야 하는데 은비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요. 체험학습 신청서는 다녀와서 제출할게요. 전에 학교에서도 미리 신청 못해도 다 해주셨는데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는 미인정결석으로 체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미인정결석으로 체크하세요. 할 수 없죠. 아마 방학식 때까지 못 갈 것 같아요. 외갓집이 전라도라서요. 개학하고 보낼게요."
방학이 3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 이렇게 안타까웠던 적은 정희 교직생활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건선생님 바쁘세요?"
정희는 통화를 끝내고 보건실로 찾아갔다. 보건실에는 6학년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이마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어서 오세요."
보건교사인 민정은 정희에게 들어오라는 표정을 보이며 다시 남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리고 이마에 붙인 밴드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준다.
"이제 됐어. 소독은 했지만 혹시 흉이 질지도 모르니까 병원에는 다시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
"네."
남자아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정희를 지나쳐 밖으로 나간다.
"요즘 애들은 진짜 무서워요. 샤프로 이마를 긁었대요. 다른 애가."
"일부러요?"
"쟤 말로는 친구가 일부로 긁었다는데, 더 깊이 안 다쳤으니 다행이지. 흉 질지도 모르겠네요. 휴우."
습관처럼 민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정희에게 앉으라며 남자아이가 앉았던 동그란 의자를 손으로 권한다.
"앉으세요. 선생님. 은비 때문에 오신 거예요?"
"엄마랑 통화했는데, 이삿날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계단에서 굴렀대요. 그리고 내일부터 체험학습 써서 안 나오겠다는데, 내가 미인정결석이라고 했는데도 그냥 안 나오겠다네요. 너무 이상하고 찝찝한데, 선생님이 보신게 확실하면 바로 신고할까 봐서요."
"그래요? 전화를 괜히 했나...... 이상하긴 하네요. 그래도 확실한 게 아닌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신고를 함부로 할 수도 없고요. 교장선생님께는 말씀드리셨죠?"
"했죠. 근데 확실한 것도 아닌데 신고할 수가 없다고 그러네. 일단 출결은 미인정결석으로 처리하고 개학 후에 아이를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네. 별일이야 있겠어요. 애가 똘똘해 보이기는 하던데. 가정의 사정이 다 다른 거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긴 하죠.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니고요."
"나도 우리 애 키울 때 사실 좀 때리고 그랬거든요. 아빠 없이 자랐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더 엄하게 키우긴 했는데, 지금 잘 자란 거 보면 또 별일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맞다. 작년에 결혼한 아드님! 제주도에서 사신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그래도 아들이 제주도로 훌쩍 가버리면 자주 보지도 못하고 좀 서운하지 않으세요?"
"서운하긴요 뭘."
"저는 애가 이제 6살인데 나중에 장가보낼 생각 하면 벌써부터 서운하더라고요."
"아이고 보건선생님, 아직 6살이라 그래요. 사춘기 오면 빨리 집에서 내보내고 싶어 질 거예요. 호호호."
"그렇겠죠? 하하하."
보건실에서 나온 정희는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다. 학부모들은 교사를 걸핏하면 아동학대로 신고하는데, 학교에서는 학부모를 신고하는 일이 아직도 이렇게 어려울 수가. 무엇보다도 은비가 마음에 걸려 소화가 되지 않은 찹쌀떡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방학이 이제 이틀 남았는데, 정희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방학식 때 아이들에게 나눠주려고 쿠팡에서 산 간식봉지 하나와 책 한 권을 들고 은비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퇴근시간이 지난 오후 5시, 은비가 산다는 건영빌라 101동 앞에서 정희는 403호를 올려다보았다. 베란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이 더위에 창문을 모두 닫고 있는 것도 이상하긴 할 텐데, 그래서 오히려 위화감이 없었다. 정희는 계단을 올라 403호 앞에 섰다. 가만히 현관문에 귀를 대보았다. 도둑질을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정희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울려서 집 안에서 무슨 인기척이 느껴지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요즘에는 가정방문이라는 게 없어지긴 했지만 정희가 초임시절에만 해도 가정방문이 간혹 이루어지곤 했다. 지금은 학부모들이 정희보다 다 어려졌지만 그 당시에는 정희의 큰언니, 큰오빠 뻘인 학부모님들이 정희에게 "선생님"하면서 깍듯하게 대했는데, 요즘에는 하교지도할 때 마주치는 학부모님들이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칠 때면 서운하기보다는 그게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요즘세상에 가정방문이라니, 내가 미쳤지,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며 정희는 들고 온 꾸러미를 현관문고리에 걸어두고 돌아섰다.
"그래. 외갓집 갔다니까 집에 없겠지. 나도 늙었네, 늙었어. 오지랖은."
정희는 혹시 집에서 은비나 은비 엄마를 마주칠까 봐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죄책감을 떨치려고 여길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