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애기가 좀 밑으로 쳐졌네요. 경부길이 한번 재봐야 할 거 같은데요."
성지는 혼자서 정기검진을 온 걸 후회했다. 은성이 오늘 늦는다고 해서 호기롭게 혼자 왔는데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배가 좀 쳐지긴 했죠? 서서 일하다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괜찮겠죠 선생님?"
성지는 의사에게 괜찮다는 말을 꼭 듣고 싶어서 괜찮지 않겠냐고 굳이 물어보았다.
"경부 길이가 지금 2.4cm네요. 짧은 편이에요. 너무 서있지 마시고 누워계세요."
"앉아 있는 건 안 되나요? 방학하려면 아직 일주일 남았는데요."
"교사라고 하셨죠? 아직 응급은 아니니까 꼭 누워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누워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러다가 자궁수축 오면 바로 출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거든요."
의사는 놀라서 입을 벌린 성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아니 지금 당장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고 그럴 확률이 있다는 거니까요. 너무 겁먹지는 마시고, 일주일 동안 무리하지 마세요."
성지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임신하고도 다들 일하는데, 유난스럽게 벌써 애가 나오느니 어쩌니 하는 의사 말이 아니꼽기도 했다.
'어휴, 나도 누워있고 싶다고.'
오늘도 1교시가 시작하고 20분쯤 지나서야 어슬렁 거리며 교실로 들어서는 진석이를 보며 성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입학하고 한 학기가 다 지나가는 지금까지 진석이는 지각하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머리는 까치집을 지었고 입에는 침자국인지 하얀 무늬가 땀으로 조금 지워진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아이가 지각을 하지 않도록 습관을 잡아주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입학하고 일주일 만에 진석이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진석이 어머님은 입학하기 한 달 전인 올해 2월에 둘째를 출산하고 친정에 가 계셨다. 그래서 입학식에도 아빠와 할머니만 오셨다고 했는데, 사실 입학실날 아이가 누구 손을 잡고 왔는지까지 다 기억나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진석이가 동생이 태어나고 입학도 하느라고 힘이 들겠네요. 그래도 어머님 아버님이 조금만 더 신경 써주시면 잘할 아이니까 9시 이전에 등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성지는 둘째를 낳았다고 첫째를 이 정도로 방치하는 부모가 사실 이해되지는 않았다. 한 달이면 집에 돌아와도 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친정에 계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진석이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엄마와의 통화는 성지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성지는 산후 조리원은 탐탁지 않아서 예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정엄마가 도와주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산후 도우미만 예약해 둔 상태인데, 출산이 점점 다가오자 사실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출산자체도 두려웠지만 조그만 아기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을 과연 잘할 수 있을까가 요즘 최대 관심사라 퇴근하면 유튜브에서 신생아 육아법을 검색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어린 8살짜리를 저렇게 나 몰라라 하고 둘째만 데리고 친정에 가 있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진석이 어머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거리는 것 같았다.
"선생님, 아직 애 안 낳아보셨죠? 애 아빠 말 들어보니 젊으시던데 출산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진석이는 알아서 할 나이도 되었으니까 애가 지각하면 선생님이 꾸중해 주세요. 그럼 꾸중 듣기 싫어서 제가 알아서 잘 일어날 거예요."
성지는 이런 게 싫었다.
선생님 결혼 안 하셨죠?
선생님 애 없으시죠?
선생님이 아직 어리셔서 모르시는 거예요.
나중에 애 낳으시면 부모 마음 이해하실 거예요.
부모 마음은 부모가 알면 되지 교사에게 왜 부모 마음을 강요하는 건지도 의문이었고, 부모 마음으로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규칙과 원칙을 중시하는 성지는 그런 말을 하는 부모님들은 아이를 얼마나 '부모 마음'으로 키우고 있는 건지 반문하고 싶어 진다.
아직 일 학년밖에 안 된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놀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학원 가는 게 너무 싫은데 할 수 없이 다닌다는 말도 한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화낼 때는 너무 무섭다고 한다.
가끔은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안쓰럽고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성지는 아이들이 좋고 그런 엄마가 안 되야지 생각한다.
유난히 성지의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석이가 이상해서 쉬는 시간에 진석이를 불러 물어보았다.
그러자 진석이는 기습적으로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뻗어 성지의 배를 쿡 눌렀다. 성지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다른 사람 몸에는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야."
성지는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기분이 몹시 상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진석이에게 말했다.
"애기는 싫어요. 동생 미워요."
진석이는 그 말을 하고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석이가 동생 때문에 많이 힘이 든 모양이다. 성지는 진석이가 안쓰러웠지만 내 배속에 있는 아이가 그 말을 들을까 봐 배를 감싸 쥔 손을 풀지 않고 진석이에게 말했다.
"진석아 동생이 태어나서 힘들구나? 그래도 네 동생이잖아. 너무 미워하면 안 돼. 그럼 엄마도 힘드시고, 진석이도 힘들어져. 하지만 동생이 미운 감정이 들 수는 있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진석이 조금 진정하고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올래?"
진석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소란스러운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거나 색종이를 접고 있다.
다행히 진석이가 우는 걸 본 아이는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배를 쿡 찔린 상황은 퇴근을 하고도 기분 나쁘게 성지의 가슴에 남아있다.
게다가 산부인과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많이 심란했다.
진석이의 마음까지 헤아려주기에는 성지의 상황도 좋지가 않아서 오늘 울었던 이야기는 굳이 진석이 어머님게 전화하지 않았다. 5월까지는 진석이 어머님에게 자주 전화를 드렸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은 진석이가 혼자서 잘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혼내주라는 말만 하고 지친 목소리로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선생님 신생아 키우는 게 얼마나 고된 줄 아세요? 애 낮잠 잘 때 집안일하고 저도 한숨 자야 하는데 이렇게 전화하는 시간도 사실 아깝고 힘이 들거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진석이 어머님에게 더는 전화하지 않았다. 아버님에게도 전화드렸지만 진석이 엄마랑 이야기하라는 말만 하시는 통에 그것마저도 그만두었다.
진석이의 마음은 누가 위로해 줄까. 성지는 자신이 이 아이들을 만날 시간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둘째는 낳지 말아야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