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호연선생님, 이번 여름방학에 유럽 간다며?"
"아, 네. 태어나서 해외여행 처음이에요."
"그래요? 의외네. 벌써 여러 번 다녀왔을 거 같은데."
"하하하. 그런가요? 쥐꼬리만 한 월급 모아서 가려니 좀 힘들었어요. 하하하하."
"그래도 남들은 되고 싶어 하는 공무원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세금으로 월급 받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래 말하는 거 남들이 들으면 욕해."
"아, 네."
호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하니 자꾸만 인상이 써지는 느낌이라서 표정관리를 하느라 할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우리 때는 해외여행이 뭐야. 방학 때도 학교 나와서 일하고 그랬지. 참 신재연 선생님도 이번에 유럽 어디 간다던데 같이 가는 건 아니지?"
호연은 속으로 놀랐지만 이런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미리 연습해 둔 대로 의연한 척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재연 선생님도요? 와 신기하네요. 유럽도 땅덩어리가 넓어서, 저는 동유럽 위주로 돌건대, 그 쌤은 어디가 신대요?"
"몰라. 유럽이면 영국이나 프랑스 아니겠어?"
"그렇구나. 저는 영국은 안 가요."
라테부장님은 오늘도 결국 옛날이야기를 하시며 혀를 끌끌 찬다.
호연은 60이 넘은 부모님도 저렇게까지 고지식하지는 않은데 저분은 대체 왜 저럴까, 생각하며 역시 인간은 참 다양하다는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내 돈 내고 내가 여행 가는데 뭔 상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호연은 라테부장님께 고개만 까닥하고서는 재빨리 층계참으로 내려갔다.
'아, 올라갔어야 하는데. 당황했네 당황했어.'
교실로 가려면 올라가야 하는데 황급히 내려와 버렸으니 반대쪽 층계로 올라가려고 1층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학교는 조금 적막하지만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다. 방과 후 교실과 돌봄 교실이 모여있는 본관 우측은 여전히 생기가 가득하다.
돌봄 교실을 지나가는데 교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호기심에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호연은 그만 돌봄 전담사인 여진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여진의 눈빛에 민망해하며 호연은 다시 복도 쪽으로 몸을 틀어 계단으로 향했다.
책상이나 의자가 넘어지는 듯한 우당탕 소리가 들렸는데 여진은 너무 침착해 보였다. 2학년 아이 중에 굉장히 폭력적인 아이가 있다고 들었고, 그 아이가 돌봄 교실에서도 여러 번 친구들을 때렸다고 한다. 호연은 2학년 1반 담임교사인 재연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아이가 1학년때부터도 교실에서 이탈을 자주 하고 선생님에게도 욕을 하기도 해서 재연이 그 아이를 떠맡다시피 하며 2학년이 된 사연이 있다. 암묵적으로 학교 안에서 진행된 사연이지만 사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호연은 더욱 잘 알고 있다.
재연은 저학년이 처음이라며 당시 울상을 지었다. 6학년만 내리 3년을 맡았던 이유는 그게 편해서였고, 저학년은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 학교의 가장 문제가 되는 금쪽이는 2학년에 있고, 그 아이를 마크해 줄 담임이 필요했다. 작년 금쪽이네 반의 담임은 2번 교체가 되었다. 처음에 맡았던 고나린 선생님이 아이에게 오른팔 안쪽을 물리고 한 달 동안 병가를 냈다. 병가를 낸 동안 잠시 오셨던 기간제 선생님은 이런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채용했다는 것에 분노해서 교감선생님과 한판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기간제 선생님은 심지어 교감선생님의 동기인데 얼마 전에 명퇴를 하시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계시던 분을 억지로 데리고 왔기에 교감과 기간제 선생님은 그 일로 절연을 했다나 뭐라나.
고나린 선생님이 다시 돌아왔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육아휴직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그 공백을 메워준 게 라테 부장님이셨다. 4학년 과학전담을 하고 계시던 라테 부장님은 교장, 교감선생님과 어떤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나서 금쪽이 반의 담임이 되었다. 금쪽이는 라테 부장님이 담임이 되고 나서는 큰 사건 없이 일 학년을 마무리했다. 그 애는 아마도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인가 보다고 우스갯소리로 말을 했지만 라테 부장님도 단 4개월 맡고 나서 학을 떼고 올해는 업무 없는 3학년 음악전담을 맡았다. 아마도 작년에 이런 거래가 있었지 싶어서 호연은 씁쓸했다.
그런 금쪽이를 올해 재연이 맡게 된 것이다. 젊은 남자 선생님이 금쪽이를 맡은 올해는 1학기 동안 겉에서 보기에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교실 안에서는 매일매일 재연과 다른 친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금쪽이는 한 번 화가 나면 분노가 폭발하는 편인데, 힘이 조금 세진 요즘은 의자를 들어서 던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걸 다른 아이들이라도 맞을까 봐 재연은 늘 금쪽이를 교사책상 옆에 붙박이로 앉혀놓고 협력교사 선생님도 늘 아이의 주변에서 다른 친구들이 다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호연은 6학년 교실이 있는 5층까지 올라갈까 하다가 3층에서 몸을 돌려 2학년 1반으로 향했다. 짐짓 그냥 지나가는 척하며 교실 안쪽을 슬쩍 넘겨다 보니 재연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들어오라고 손을 까딱까딱한다. 뒷문을 스르르 열고 통화에 방해될세라 살금살금 교실로 들어갔다.
"네 어머님. 그럼요. 제가 내일 규한테 다시 한번 얘기할게요. 협력교사 선생님도 규 옆에서 잘 지켜보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요.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재연은 호연에게 싱긋 웃어준다. 아 저 눈웃음.
"또 왜 규가 말썽 부렸어?"
"어디 하루 이틀일인가. 날이 더워지니까 애들도 지치는지 자꾸 다투네."
"빨리 방학을 해야 하는데."
"규는 방학 때도 돌봄에 계속 나온대."
"애들도 참 힘들겠어. 방학 때 쉬지도 못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더 폭력적이 되는 거 아닌가?"
한숨을 몰아쉬며 재연은 앉으라고 교사 책상 옆에 있는 작은 책상, 아마도 규의 책상을 가리킨다.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호연은 밖을 한번 쳐다본다.
"자기한테는 유럽여행 가는 거 뭐라 하는 사람 없어?"
"왜? 누가 뭐래?"
"라테 부장님도 약간 아니꼽게 얘기하고, 저번에 교감선생님도 여행 말고 연애하라고 그러잖아. 완전 사생활 침해 아닌가."
"하하, 교감선생님 나중에 알면 놀라시겠다."
호연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교실로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칼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일하러 갈게. 이따가 봐."
"응 수고"
손을 흔들고 호연은 다시 뒷문으로 다가가 밖을 살피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후다닥 밖으로 나와 계단으로 올라갔다. 퇴근 후 재연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호연에게는 삶의 낙이다.
연애를 하게 된 이후로 출근하는 게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애가 비밀연애라니, 너무 쫄깃하다, 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