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는 채언니와 죽이 꽤 잘 맞았다. 우리는 퇴근 후 자주 만났고, 휴가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그 해 겨울에도 일본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엄청난 양의 폭설이 전국에 쏟아졌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전날 나는 일기예보도 확인하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예정된 시간에 눈을 떴고 세상은 온통 하얬다. 내 머릿속도 하얘졌다.
나는 전철역에 가려면 마을버스를 최소 20분쯤 타고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었다. 지하철은 많이 막히지 않을 테니, 마을버스만 적당히 도착해주면 미친 듯이 뛰자.
어제 싸 둔 짐을 챙기고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이 망할 놈의 마을버스는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버스정류장 표지판 하나 달랑 서있고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서비스 따위는 없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직 내 주위에는 거의 다 피처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버스는 당최 언제 온다는 건지 모르겠고,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하는데 꽤나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눈이 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나만 생각한 이기적인 마음이었던 것 같다.
변명을 해보자면 언니는 전철역을 도보로 다닐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하철 시간만 잘 맞추면 무리가 없었겠지만, 나는 마을버스가 안 오는 걸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1시간 여만에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차라리 내가 내려서 걸어가는 게 빠를 것 같은 속도로 아파트 사이를 엉금엉금 주행했다. 다행히도 큰길에 나와서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내주었으나, 지하철 역까지 넉넉잡아 30분으로 예상했던 나는 무려 2시간 만에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지하철은 많이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으며 일단 탄 다음에는 제 속도로 달려주어 인천공항역에 하차했다.
해외에 가려면 원래 일찍 탑승수속을 해야 하므로 우리는 출발시각 2시간 전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 넓은 인천공항을 덜컹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달렸다. 캐리어는 제멋대로 휘청거렸다.
제주항공의 발권창구에 도착하니 언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언니 너무 늦었어. 미안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나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눈이 많이 온 건 나에게만 해당된 게 아니다. 오늘 이 공항에 오기로 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상황이었고, 내가 탄 항공기에서 나는 가장 늦은 사람이었다.(비행기 문 닫고 들어갔다.)
언니의 표정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화를 내거나 나를 탓하지 않았기에, '이건 천재지변이니까' 크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탑승한 후에도 활주로에 2시간 정도 발이 묶여있었긴 했지만 우리는 그날 예정대로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_픽사 베이
그 여행은 나에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곳저곳 구경하고 라멘과 오코노미야끼가 맛있었다, 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한 번씩 떠오르는 옛 기억들의 홍수 속에 "혹시 언니가 기분이 많이 나빴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생각은 "나빴겠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여행에서 내가 느꼈던 것과 언니가 느꼈던 것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당시 그녀는 몹시도 짜증이 났을 것이다. 내가 오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비행기에 타지 못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그런데 늦게 온 사람이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해맑게 웃고 있으니 얼마나 화딱지가 났을까. 얼마나 빙썅 같았을까
눈이 왔으니까 내가 늦은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고, 나는 소중한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은 파렴치한이 되었다.
얼마 전 내린 폭설로 시작된 10여 년 전 언니와의 기억이 또다시 나를 부끄러움으로 인도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없다. 물론 초코파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기적이었던 나를 용서해 달라고, 앞으로는 미안하면 표현하겠노라고, 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진 못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보지만 많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언니에게 카톡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