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국룰이라고 여기는 이 말 때문에 사실 조금 망설였다. 엄마에게 남편이 운전연수를 해주기로 했다고 하니 극구 말리셨다. "야야 그냥 돈 주고 배워라. 괜히 이서방 화 돋우지 말고."
그러나 가르쳐준다고 나를 꼬신 건 고미씨였고, 딱히 운전을 하고 싶지 않은 건 나였다.
겨울이 끝나가는 2월의 따뜻한 어느 일요일이었다. 인적이라곤 하나도 없는 막다른 길(고미씨는 어디서 그런 길을 찾았는지 모르겠다.)로 나를 인도한 그는 차에서 내렸다.
"저기까지 가서 유턴해서 다시 이쪽으로 와 봐."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손은 흥건한 채로 천천히 유턴을 하고 있었다. 도로 턱에 닿을락 말락, 잘 모르겠다. 에라 핸들을 휙 돌렸다. 나는 우당탕탕 쿵쾅 소리와 함께 인도 위로 반쯤 걸쳐졌다. 어디선가 햇살아래 나른하게 누워 낮잠을 즐겼을 동네 개들이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단잠을 깨운 나를 원망하듯, 내 차 주변을 에워싸고 컹컹거리던 개들에게 나는 호기롭게 클락션을 빵빵 울려댔다.
이 모든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그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뭐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나는 얌전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예상과 다르게 다가오는 그의 표정은 장난스러운 어린아이 같았다.
"흐흐흐 동네 개들 다 몰려왔네."
고미씨는 조수석에 앉아 후진하면서 회전하는 방법을 목소리 톤 하나 바꾸지 않고 알려주었다.
그의 차분함이 신선했고, 믿음직스러웠다.
나 결혼 참으로 잘했군.
그는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결손가정출신"이다. 내로남불을 시전한 시아버지는 아내와 두 남매를 버린 채 떠났다. 아이들에게 한창 아빠가 필요한 시기에는 연락 두절이었다. 남편 말에 따르면 함께 살던 여성분과 헤어지고 나서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내가 고미씨를 만났을 때는 본인 아버지와 연락을 주고받은 지 5,6년 정도 되었을 때다.
사실 나야 제삼자에 불과하니 그분들의 가정사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도 인간이다 보니 생각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나는 가끔 만나는 시아버지의 말과 행동들이 꽤 불편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도로에 있는 모든 차 욕하기, 식당에서 한 번도 맛있었던 적 없이 늘 이 집은 맛이 없네 불친절하네 등의 불만 토로하기,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며느리인 나에게 본인 사위 욕하기 등등.
나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오히려 고미씨가 "결손가정"에서 자란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화를 잘 내는 아버지한테 어떻게 저렇게 화를 안내는 아들이 나온 걸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두 사람은 극과 극이었다.
많은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불쌍하다거나 뭔가 결손이 있을 거라는 판단을 우리는 쉽게 한다. 하지만 고미씨의 가정을 보면서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가족구성원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어머니가 훌륭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자명한 진리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채 의기양양하게 나의 운전연수는 막을 내렸다. 지금도 벌벌 떠는 운전자이지만 이제 초보운전 스티커는 붙이지 않는다. 낯선 길을 갈 때는 꼭 한 번씩 길을 잘 못 들지만 뭐 어떤가, 내비게이션에서 울려 퍼지는 말이 나를 안심시킨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돌아가도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되니까 말이다.
고미씨와 그의 젊은 엄마가 살았던 힘든 시기를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다만 구불거리고 우당탕퉁탕 거리고 후진하고 회전해야 했겠지만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사실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