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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Dec 26. 2022

엄마와 버스 손잡이

스스로 중심 잡는 삶

-왜 이렇게 손잡이를 잡고 있어? 무서워?

-고미씨가 운전하는 차에서는 손잡이에 저절로 손이 가.

조금만 천천히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최대한 순화된 언어로 표현해 본다. 그는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고, 20년 무사고를 자랑하니 사실 그의 조수석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내 몸이 중심을 잡기 어려운 순간에는 살아야겠다는 본능으로 뭐든 꽉 잡게 된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심지어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말이다.


손으로 무엇인가를 움켜쥐게 되면 자연스레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이십 대에 타는 유럽행 비행기는 셀카와 기내식으로 설레는 마음뿐이었는데, 이제는 제주도행 비행기조차 무서워서 벌벌 떨며 옆에 앉은 남편 손을 꼭 잡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나도 나이가 든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엄마는 자리에 앉아서도 좌석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꼭 잡고 있었다. 

-엄마. 손잡이를 왜 잡고 있어? 앉아 있으니까 안 넘어져.

-너도 늙어봐라.

이 말을 할 때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을 거다. 그 말이 참 듣기 싫었다.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엄마처럼 나이 들진 않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에는 자가용이 있는 집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내가 살던 지역에는 지하철이 없었기 때문에 버스는 필수 교통수단이었다. 시장에 갈 때면 엄마는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버스에 오르곤 하셨다. 장난꾸러기 오빠는 엄마 손을 뿌리치고 창가 자리로 냅다 뛰어가 앉기 일쑤였다. 그날은 버스에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간판의 글자들을 띄엄띄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 기사아저씨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아저씨, 내려주세요. 내려주세요. 우리 아들이 지금 혼자 내렸어요!!

방금 버스정류장을 지나친 기사님은 다행히도 급하게 차를 세워주셨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오빠 이 자식 또 사고 쳤군, 이라는 생각 한편으로 엄마의 다급함 속에 배어 있는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를 찾은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엄마는 별 일 아닌 듯이 오빠를 불러서 다시 손을 잡고 버스를 탔을 거다. 그렇게 젊은 시절 엄마는 감정기복이 심하지 않으셨다. 화를 크게 내던 기억도 없고,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인 기억은 더더구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버스 안에서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뛰어내리던 그 장면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직도 엄마는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신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그걸 타고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다니실 거다. 그렇게 성당에 가서 아마 우리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시고 다시 버스를 타실테다. 




나는 사춘기 시작 이후로 엄마와 팔짱은 낄 망정 손을 잡지는 않는다. 심지어 팔짱을 낄 일도 많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 어릴 때 꼭 잡아 준 손 덕분에 커서는 각자 삶을 살 수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한다.


엄마가 버스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꽉 잡던 그 손이 어렸을 때는 부끄러웠다.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도 달리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스스로 손잡이를 잡고 중심을 잘 잡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엄마가 늘 내 손만을 잡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엄마는 엄마의 중심만 잘 잡으면 된다고 그런 말을 내게 건네었던 게 아닐까.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니 나도 엄마처럼 스스로 중심을 잡는 사람이 되는 게 자식에게나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느낀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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