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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Dec 28. 2022

찌질함의 쓸모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좀 찌질하다. 아웃사이더라도 뭔가 멋들어진 아싸들이 있는데, 나는 전혀 멋진 아싸가 아니다. 그냥 찌질한 아이였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별명은 '자다 일어난 애'였다. 별명이라고 있어본 적이 그때뿐이었으니 그런 별명이라도 감지덕지했어야 했나. 그런 별명 따위는 남자애들이 나를 부를 때 쓰던 말이었다. 머리도 옷도 자다 일어난 애처럼 부스스했다는 뜻이었을 거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외모에 신경을 좀 쓰고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 무난도 하지. 그런 말을 듣고도 별로 기분이 더럽지가 않았다. 내가 그런 말들에 의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는 반장이었고 시험을 보면 늘 1등이었기 때문이었다.(글로 쓰니 재수 없네, 초등 때 반장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고 1등은 아무 의미 없으니 그냥 넘어가시길)

찌질한데 웬 반장인지, 나는 반장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애를 반장후보로 세우곤 했다. 게다가 말없고 나대지 않으니 반장감으로 딱이라고 생각했겠지. 물론 당시에는 평균 몇 점 이상만 후보로 오를 수 있는 이상한 규정이 있기도 했다.

나는 어찌나 찌질했던지, 당당하게 "저는 반장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조차 못 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현실 순응적이었다.

속으로는 너무 하기 싫었지만 단상 앞에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이러고 있었던 어릴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이 기어 나온다.  


내 기억 속 13살의 나는 우리 반 여자애들 중에 제일 키가 커서 항상 뒷자리에 혼자 앉았던, 어깨도 구부정하고 옷도 매일 똑같은 것만 입는 눈에 전혀 안 띄는 아이였다. 일 년 내내 키대로 앉았다. 여자가 딱 한 명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일 년 내내 짝꿍 없이 혼자 앉았다. 좀 외로웠다.


6학년 때 우리 담임선생님의 말씀 중에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나는 교사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아프셔서 어쩔 수 없이 교사하는 거야. 원래는 치과의사 했어야 했는데.

아, 어쩌라고. 왜 그따위 말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외톨이처럼 앉아 있어 본 경험, 친구에게 먼저 말 걸기 어려운 그 마음이 어떤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반항해보고 싶지만 모범생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발산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고스란히 남아 어른아이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고 있다.


그래도 내가 가장 큰 위로를 받는 건, 나의 찌질함이 쓸모를 발휘할 때다.

엉거주춤 서있는 아이, 말은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어린 시절의 나의 마음에 빙의되어 관심법을 쓰게 된다.

-수민아, 친구들하고 같이 이거하고 싶어?

친구들 뒤에서 끼워달라는 말은 못 하고 엉거주춤 서있는 아이에게 먼저 물어보면 거의 다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 하고 싶어도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도 많다. 그럼 한 번 더 물어봐준다. 원래 두 번쯤 권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수민아, 친구들한테 같이 하자고 할래? 얘들아, 수민이도 하고 싶은지 물어봐줄래?

그럼 대부분의 아이들은 너무나 흔쾌히 물어봐준다.

-수민아. 같이 하자.

내가 같이 하라고 억지로 엉덩이를 떠밀지 않아도, 친구들의 권유에는 은근슬쩍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내 표정이 밝아진다.

나의 찌질함의 역사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잘 먹힐 때가 종종 있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찌질함 덕분에 나 같은 어린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이 쏠린다. 대신 부작용은 진짜 인싸들에게는 살짝 소홀해지기 쉽다는 거다. 물론 그들은 내가 관심을 크게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인싸로써 풍족하리라 믿는다.


아이들이 홀수이면 누군가는 세 명이서 앉게 하고,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는 아이에게 눈이라도 마주쳐주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겉모습이 찌질하다고 마음까지 찌질한건 아니라는 걸 아는 내가, 이제는 어린 시절 찌질했던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대문사진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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