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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Dec 29. 2022

큰 손 여자와 작은 손 남자

부부의 세계

우리 엄마는 손이 크다. 뭘 하든 한 솥 하신다. 나정이 엄마처럼.

결국 며칠을 먹다가 남아 쉬어터진 음식들은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버려지기 일쑤였다. 아니 버려진 건 사실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음식을 버리는 일은 우리 집에서는 굉장히 금기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쉬어터진 음식을 잘 갈무리해서 오빠와 나에게 먹였을 것 같기도 하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장이 건강한 것은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음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반면 시어머니는 손이 작으시다. 뭘 하시든 모자란다. 그리고 최소 두 번 이상 먹은 반찬들은 죄다 싱크대로 직행한다.


우리 집에서는 국을 남기면 다시 냄비에 부어서 한 뜸 끓여 식히고 다음에 또 그걸 퍼서 먹는다. 그게 굉장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다. 시가에서 남은 국을 냄비에 부었다가 시어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맞은 이후로 시가에서는 나도 뭐든 버린다.


사실 유통기한 며칠 지난 우유를 먹고 탈이 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는 내가 먹는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이 말이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면 기겁을 한다. 그리고 굳이 먹고 있는 우유를 빼앗아서 싱크대에 버린다. 싱크대로 넘실넘실 흘러내려가는 우유를 보면 괜히 속이 쓰리다.


우리 엄마의 냉동고에는 정체불명의 까만 봉다리들이 그득하다. 나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고 싶지도 않고, 사실 냉동고를 최대한 열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 집에 머무는 동안 나오는 떡이며, 곶감이며 고깃국에 들어간 고기들은 아마도 그 검은 봉다리 안에서 나왔을 것이다. 나는 굳이 묻지 않고 조용히 그것들을 섭취한다. 돌아와서 탈이 나본 적도 없다. 장이 약한 남편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시어머니의 냉장고는 정말이지 깔끔 그 자체이다. 냉동실에는 쓸데없는 물건이 없고, 검은 봉다리도 없다. 열 맞춰 있는 냉동실 물건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냉장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시어머니는 미니멀리스트이다. 쓸데없다고 여기시는 건 전부 당근마켓에서 직거래하신다. 천 원, 이천 원에 올리면 사람들이 금방 사간다고 좋아하신다. 지난 추석 때 본 어머님의 당근온도는 73도였다.


우리 엄마는 절대로 뭘 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티브이에 나오는 저장강박 같은 정도의 집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시골 할머니 집이다. 지저분하지만 나름 정감도 있다(고 합리화해본다.) 내가 뭘 버린다고 하면 눈을 치뜨고 큰일 날 소리를 했다는 듯이 쳐다보신다.

"엄마 쌀에 곰팡이가 났네. 이건 버려야겠어. 곰팡이 핀 쌀 먹으면 아무리 씻어도 암 걸릴 수 있대."

"그걸 왜 버리냐? 나 줘라. 내가 가져가게."

"엄마 이거 씻어먹어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5kg는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가지고 가. 어깨 나가."

"가서 닭주면 돼."

결국 그 쌀은 다음 설날에 우리가 가지고 가기로 했다. 버렸다가는 3년 동안 엄마의 잔소리를 듣게 되므로.


엄마의 시골집 옷장에는 내가 결혼 전에 입던 옷들이 아직도 즐비하다. 옷장에 다 걸 수 없어서 큰 행거가 안방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저장 강박 같은 집 아니라며? 음. 그런 집 같기도 하고.)

시어머니는 장롱의 딱 한 칸에만 옷을 수납하신다. 사계절 옷이 전부 이 한 칸에 들어있다. 요술 장롱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남편과 나는 아마 서로를 보고 깜짝 놀랐을 거다.

지금도 가끔 놀란다. 캠핑장에 쌀을 가지고 가야 해서 남편이 봉지 하나를 꺼내 담는다. 그걸 묶고 있는 모습을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면 슬쩍 내 눈치를 보다가 다시 푼다.

"그거 가져가면 내일 아침에는 뭐 먹게?"

"응 더 담을게."

손이 작은 남편은 요새 나를 닮아 조금씩 손이 커지고 있기는 하다. 이제는 말 안 해도 포도를 2송이씩 살 때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포도를 두 송이나 사다니, 큰 발전이군."


나의 손은 점점 작아지고 있고, 남편의 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 집 냉장고가 시어머니의 냉장고를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 부부도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래도 얼마 전 배달된 개밥의 스케일을 보고 우리의 손의 크기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깨달았다.

서로 같은 걸 주문했지만 다른 크기의 개밥이 왔다. 누가 어떤 걸 샀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대문사진출처 : tvn 응답하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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