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아픔과 나의 힘듦은 별개다. 많은 부모들에게 공분을 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개인주의자인 엄마는 아이가 힘든 건 아이가 극복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토하는 애 옆에서 울고 있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으랴.
아이가 토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성장한 모습이 보여 기특한 마음이 앞섰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토했던 때를 떠올렸다. 큰애가 5살, 둘째가 3살이었다. 어린이집에서 노로바이러스를 옮아왔다. 큰 아이는 엄청난 토를 해댔고, 이틀 만에 좋아졌다. 상황이 종료되는가 싶었는데 그날 밤 둘째가 자다가 이불 위에서 그대로 토를 했다. 그 바람에 나도 같이 깨어났는데, 몹시도 어지러웠다. 둘째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아이를 내려놓고 변기를 끌어안았다. 삼십몇년을 살면서 장염이 옮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친정엄마에게 말했는데, 안 옮는단다. 내가 나쁜 음식을 해 먹여서란다. 에라잇. 또 내 탓이구만.
도저히 내 몸상태로 애 둘을 돌볼 자신이 없어서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켰다. 그리고 집에서 하루종일 둘째가 게워내는 토사물을 닦으며 흐르는 눈물을 같이 닦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일까. 이번 바이러스 사태에는 아직까지는 내 몸이 괜찮아서인지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역시 인간은 정신력이 중요하군, 또 깨닫는 하루다.
애 둘이 번갈아 가며 토를 하지만, 만 여덟 살 하고 두 달이 된 큰 아이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내가 건네준 양푼에 잘 조준해서 해준다. 이것만 해도 매우 감사하다. 아이가 토를 하는데 안쓰러움보다는 이걸 닦아야 하고 빨래를 다시 돌려야 하는 것에 대한 막막함이 먼저 들었다면 나는 나쁜 엄마겠지. 그래도 어떡하나 내 마음이 그런 걸. 애가 토하는 건 안쓰럽지만 바닥에만 안 해줘도 이렇게 기분이 괜찮다니. 아니 괜찮음을 넘어서서 마음이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밤에는 잠자리에 누운 둘째가 토하고 자야겠다며 벌떡 일어서더니 '바닥'에 토를 했다. '나이스 샷'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침대 위에서 토를 했다면, 슬픔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울컥했겠지.
둘째가 태어나기도 전, 큰 아이가 아마 17개월쯤 되었을 때였나 보다. 어린이집도 안 가는 애가 말로만 듣던 수족구에 걸렸다. 아이는 입안이 다 헐어서 아프다고 나를 껴안고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같이 엉엉 울면서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해대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서 수족구에 옮게 한 것이 미안하다면 미안할테지만 말이다.
당시의 나는 아이와 분리가 되지 않았다. 아이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런 감정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커가도 계속 그 감정 안에 머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그 감정선에서 떨어져 나왔다. 만 8년 정도 키우고 나니 아이도 나도 분리가 되고 있다. 아이의 슬픔이 나의 슬픔은 아니다. 물론 안타깝고 안쓰럽고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나는 이상한 엄마인가. 아이가 토를 하는데 아이의 상태보다 빨래와 뒤처리가 걱정되다니. 나에겐 아이는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둘째는 멀쩡하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안 믿을 수 있겠니.
어제보다는 나아진 컨디션으로 양푼을 손에 꼭 쥐고 티브이를 시청하시는 만 여덟 살 어린이에게, 감동이다.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샤워도 혼자 하고, 밥도 혼자 먹는다. 그러고 보니 양치도 혼자 한지 꽤 됐고, 똥도 혼자 닦고 있었다.
이제 토도 바닥에 하지 않다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여성학자이자 가수 이적 씨의 어머니인 박혜란 님은 이렇게 말했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이 믿음이라는 게 토를 바닥에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 손이 점점 필요 없어지는구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
아프면서 크는 거야,라는 위로의 말을 나와 너에게 건네며 오늘도 병시중을 들기 위해 커피를 한잔 마셔볼까,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둘째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