좇을 것인가 쫓길 것인가. 달과 징검다리.
플라스틱 테이크아웃잔을 받았다.
분명 나는 친구랑 대화를 하려고 들어온 것이었고, 자리를 두리번거리는 모양새를 취했기에 카페 카운터에 서 있던 분은 우리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즐기려는 사람인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 탓에 딱히 머그컵으로 달라는 말을 딱히 안하고 그냥 커피를 주문해버렸는데, 플라스틱 테이크아웃잔이 나왔다.
테이크아웃잔을 얼떨결에 받아들고, 자리에 앉으면서 만지작 만지작 생각을 했다. 이거... 내가 이거 가지고 자리에 앉아있으면, 적발되면 이 카페에서 벌금을 물텐데... 어쩌지.... 머그컵으로 바꿔달라고 하려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플라스틱 테이크아웃잔을 쓰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삼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마 그 카페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개인카페의 느낌은 나지 않았고, 작은 규모의 프랜차이즈 카페 같았는데, 기생산된 플라스틱 테이크아웃잔의 물량을 처리해야했을 것이고, 혼자 근무하는 환경에서 매번 머그컵을 주고 설거지를 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들도 그럴 것이다. 테이크아웃잔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으면서 찝찝했겠지만, 뭔가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매장 내부에서는 머그잔을 이용하는 것. 분명 환경을 생각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고, 이제는 법까지 이를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가치를 좇는데에는 현실이 따라온다.
서두를 테이크아웃잔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비단 이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들어 정말정말 많이, 내가 좇는 것과 쫓기는 것 사이에서 정말 많이 갈등을 하고 있다.
가치를 좇을 것인가, 현실에 쫓길 것인가.
표현 자체를 '현실에 쫓기다'라고 했다. 뭐 흔히들 쓰는 '현실에 안주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요즘 세상에서, 아니 나라면, '현실에 안주할만한 안정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면, 분명 '가치를 좇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정말 그런 사람도 많고. '현실에 안주하다'는 정말, 나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렇다.
가치를 좇을 것인가.
현실에 쫓길 것인가.
전자를 택하든, 후자를 택하든 늘 마음은 불편하다.
전자를 택하면 세상에 불편한게 너무 많아져서 마음이 불편하고, 후자를 택하면 내가 삶을 사는게 아니라 삶이 나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 불편하다. 전자를 택하면 봐야할 것이, 알아야 할 것이, 이야기 해야할 것이, 주창해야 할 것이,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져서 힘들게 된다. 개인을 위한 시간, 친구를 만나는 시간, 나 자신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 줄어들게 되어 외롭다. 후자를 택하면 일에 치여 따로 공부할 시간도, 개인 발전할 시간조차 없어 힘들게 된다. 친구를 만날 시간이나,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이 줄어들게 되어 외롭게 된다.
사실 전자, 후자 이렇게 달리 말했지만, 상황은 똑같다. 내가 무얼 택하든 힘들 것이고, 무얼 택하든 외로울 것이다. 무얼 택하든 내 생활은 똑같을 것이다.
왜냐면, 이건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거든.
이건 생각의 문제.
지향점의 문제.
삶을 견인하는 원동력을 뭘로 할 것인가의 문제.
행동에 어떤 이유를. 근거를. 부여하느냐의 문제.
그러니까 무얼 택하든 내 생활은 똑같을 것이다. 오늘은.
하지만 무얼 생각하느냐, 지향하느냐, 무얼 원동력으로 삼느냐에 따라 내일은 달라지겠지.
물론 이런식으로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아야겠다.식의 결말은 딱히 옳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분명 가치지향적인 삶은 힘들고, 충돌이 많으며, 외롭다. 그 누구에게도 이러한 삶을 강요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가치를 좇다가, 그 가치가 나를 집어삼키는 일이, 내 본질을 집어삼키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가치란 것은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그 빛에 눈이 멀기도하고 그것을 좇던 내 원래의 의도와 목적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근거 없는 맹신. 목적없는 행동. 가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 이런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실 이러한 '가치를 좇는 삶'은, 그 가치가 나 자신을 삼킬 일이 많기에, 여러모로 경계하고 더 공부하고 더 생각하고 더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가치를 합일 시키기도, 자기 자신과 가치를 분리시키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주관적이게, 객관적이게 가치와 함께 걸어나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켜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종종 현실을 택해버리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이 불편해 다시 가치를 좇게 되고.
그리고 다시 그 가치에 함몰되어 현실을 보게 된다.
항상 이렇게 가치와 현실. 그 중점에서 계속해서 가치쪽으로만 나아가려고 아둥바둥 살다가, 혼란스럽게 방황하며 살아오다가, 최근에 그 태도에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 플라스틱 테이크아웃잔에 대하여 길게 성토했을 것이다.
머그컵을 쓰는게 어려운 일일지라도, 머그컵을 써야만한다고. 그게 우리 사회가 정한 규약이고. 지금의 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고객이 테이크아웃잔을 받았으면, 매장에 이야기해서 머그컵으로 바꿔야만 한다고.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위의 말 틀린거 하나 없다.
하지만 가치만 좇다가 가치에 함몰되는 이들을 많이 봤다. 솔직히 말하면, 이 경우는 가치에 함몰된다기보다는, 가치에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가치라는건, 마치 어떤 능력치를 요구하는 자리와 같아서, 그 자리에 적격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면, 바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게 된다.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 가치란 것이 왜 존재하는가?
크게 보면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 인류에게 어떻게하면 더 나은 세상을 줄 것인가.
그리고 더 크게 보면, 가치란 것은 '다가서야할 진리'를 위해 존재한다. 아니 그 자체일수도 있겠다.
인간을 위해 플라스틱 컵을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을 좀 더 잘 설계하고, 세밀하게 한다면, 동물을 위해, 식물을 위해,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컵을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무어라 말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좇고 있음을 마음 속으로 알고있는 그 '다가서야할 진리'.
이러한 것들을 위해 가치란 것이 존재하는데, 이런 '다가서야할 진리'에 다가서는 것은, 그러니까 이 '가치 달성'이란 것은, 믿기지 않는 현인의 등장으로, 가치 달성이 쉽고 빠르고 강력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그러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모두에게 가치를 강요한다면, 결국 가치만 남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처음부터 말했던 '가치에 함몰된다'가 되어버리는게 아닐까.
결국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치란 것은 가치만 좇게 되는 순간부터 이미 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는 전제를 '높은 확률로'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현인은 아니기에.
결국, 정말로 가치를 좇으며 현실에 쫓기지 않으려면, 가치를 보면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한다.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을 두들겨 패면서, 두 눈은 가치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면서, 징검다리를 조심히 건너야한다.
현실을 두들겨 패기만 하다가, 달을 바라보는 것을 잊으면 결국 왜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지를 잊게된다.
가치만 두 눈으로 좇다가, 징검다리를 조심히 하는 것을 잊으면 결국 현실에 빠지게된다.
시간이 오래걸려도 괜찮다.
강물 위의 달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지금 건너고 있는 징검다리 또한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한다.
달은 강물 위에 떠있기도 하지만, 강물 속에 비치고 있기도하고, 어디에서는 바닷 속에 들어있기도 하며, 누군가는 산 중턱 너머로 잘린 달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건너고 있는 징검다리는 돌다리일지라도, 누군가의 징검다리는 조약돌로 이루어져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징검다리는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져있을 것이다.
똑바로 보고, 똑바로 건너야한다.
그리고 혼자하고 있는게 아님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언제든 손을 내밀어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