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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Lim Aug 13. 2018

항상 무언가를 형상화하고 싶어 했다.

10년. 네 가지 직업으로 아둥바둥 살아온 결과,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브랜드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다 문득 들은 생각이 있어 적어본다.


항상 무언가를 형상화하고싶어했다.


그 무언가를 형상화하고싶어하는 열망이 나를 다양한 길로 이끌었다.

물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형상화하고자 하는 '무엇'은 항상 바뀌었다.




 처음에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었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영어교육과 국어교육에 몸을 불사질렀다. 학부시절, 5학년 시절에 영어전공 2개, 국어전공 4개 들었던 시절에 영어교습법 수업 시간으로 머리를 죄다 영어로 돌린 직후에, 10분뒤 고전시가 수업을 들었을 때의 그 뇌의 혼란스러움이란,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도 덕분에 코드스위칭이 잘 되는 머리가 된 듯 하다. 여튼 이러한 교육을 추구하며, 학원 일을 하게되었는데, 글쎄 생각보다 학원일에는 다양한 메커니즘이 존재했다. 본심대로 말하자면 치졸한 비즈니스가 존재했다. 결국 원생수=돈이었다. 물론 이 말에 부정하고싶은 마음은 없다. 월급은 땅파서 나오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교육 일은 비즈니스에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오히려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바른 교육'에 조금이나마 다가설수 있었다. 되려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하려면 비즈니스 시스템과 완벽하게 결합시켜야하지 않나 싶다. 좋은 일인만큼 좋은 댓가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 '바른 교육'에 다가서면서, 나의 한계와 나의 부족함을 느꼈고, 지금 이건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란걸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은 '생각한 바를 100% 손실없이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게 이루어진다면, 조금이라도 다가선다면 오해로 인한 슬픔은 없어질 것만 같았다(당시만해도 오해가 없으면 전쟁, 슬픔, 불행 등 다양한 부정적인 요소가 확 줄어들으리라 생각하는,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언어학 석사과정에 몸을 던졌다. 정확히 말하면, 심리언어학이며, 인지과학 관점에서 바라보는 언어학이었다. 언어학이지만, 정성적 지표보다는 정량적 지표를 찾으며, 언어직관보다는 데이터를 찾는 그런 관점이었다. 물론, 기존 클래식한 언어학의 기조인 언어철학, 의미론, 통사론(촘스키), 음운론, 음성학 모두 재미있었고, 심리언어학을 할 때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해내었다. 여튼 언어의 층위에 대해, 언어를 바라보는 다양한 view에 대해 이해하고 작게나마 깨닫게 되면서, 생각한 바를 전달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할 몇몇 것들에 대해 알게되었다. 아직도 이 '알게 된 것'들을 내가 언어로 정확히 구현시키지 못하는게 문제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체화되었다고 해야할까. 습득했다고 해야할까. 뭐랄까... 언어에는 맛이 있는데 그 맛이 무언지는 설명 못하지만, 그 맛이 왜 나는지는 어느정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인지과학 관점에서 바라본다. 라는 것 덕분에 통계에 대해서, 그러니까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분석해내고, 올바르게 함의를 뽑아내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대부분의 사회현상의 끝은,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는가. 올바르게 분석해냈는가. 올바르게 함의를 뽑아내었는가. 로 이어짐을 알게되었다. 덕분에 나 스스로가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언어학'이라는 안경을 작게나마 얻게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생각한 바를 100% 손실없이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다가서면서, 나는 나의 생각의 부족함, 경험상의 부족함을 느꼈고, 현실의 장벽(공부를 계속하면서 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것은 생각보다 힘들다.)에 부딪히며, 지금 이건 내가 끝을 볼 수 있는게 아니란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언어학을 파고들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완벽한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게 이루어진다면, 사람은 무언가를 완벽하게 인지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이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100% 손실없이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디자인에 대해 파고들며, 직접 편집 디자인을 조금이나마 해보면서 디자인의 짜릿함, 디자인의 함의를 조금이나마 알게되었다. 당시에 디자인 관련한 아티클만 있으면 눈에 불을 키고 읽었고,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을 팔로우하면서 열심히 배워나갔고, 일요일마다 디자인 스튜디오에 달려가서 철용님에게 열심히 이런저런 것들을 배웠다. 기껏 1년 반 정도 했기에,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룰 줄 알게 된것과,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구분할 수 있게된 것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조금 더 허세를 부려 말하자면, '완벽한 디자인'이란건 존재하지 않고, '목적에 맞는 디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 해야할까.


 이렇게 '완벽한 디자인'에 정말 한 발자국 움직이면서, 나는 '순수한 의미의 훈련'에 대한 부족함을 느꼈다.(디자인을 잘한다는건, 결국 작업을 얼마나 많이 해보았느냐. 얼마나 많이 보았느냐.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해보았느냐의 의미에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부족함을 느끼며, 지금 이건 내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영역이란걸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은 '사람에 대한 이해'였다. 좀 더 어두컴컴한 속내를 드러내자면, '내가 사람의 행동. 행동 이유. 근거. 모티브. 세상의 흐름. 트렌드. 트렌드를 촉발시키는 자 등에 대해 선점하고 이해를 확실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무조건 '이걸'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열망이었다. 좀 말이 길어서 문장이 이상해졌는데,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설계한대로 사람들이 이 제품/서비스를 구매/이용하지 않을까'였다.

 그렇기에 온라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내가 설계한대로, 사람들이 따라주고, 반응하며, 제품을 구매까지 한다면 너무나도 짜릿할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TV나 놀이터보다는 컴퓨터와 친했던 나였기에,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살아 온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허세 좀 더 부려서 말하자면, 내가 엊그제 본게, 오늘의 트렌드였고, 내가 좋아요 누른게, 오늘의 핫한 아이템이었고,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곳이, 오늘의 핫플레이스였다.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만큼, 나는 온라인 그 자체와 매우 친근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웹의 흐름은 늘 같았다. 물론 부끄러운 발언이고, 허세 가득한 발언이며 철부지같은 발언이다. 하지만 내 업에 대해 당당히 자신감을 갖고 말하자면, 나는 조금 읽을 줄 알았다.(물론 맞은게 절반. 틀린게 절반이었지만.)

 온라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세대와 집단들을 인지하고 이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이해하는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영향력이 큰 집단들만 말하자면, '트렌드를 한참 앞서가는 트렌드세터들(이들은 이미 주변 환경이, 채널 자체가 '끼리끼리'이며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탓에 이들이 즐기는 것 자체가 핫한 무엇이다)'이 있고, '그 트렌드를 즐기는 일반 유저들'이 있으며, '트렌드와 무관하게 본인의 것들만 좇는 Geek들'이 있으며(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문화가 곧 어떤 트렌드가 된다. 아주 자주 그래왔다), '트렌드에 관심없고 본인의 것도 좇지는 않지만 주변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있으며, '항상 뒤늦게 트렌드를 줍는 이들'이 있었다. 간편하게 이 정도 다섯 집단 정도가 주로 구매를 하며, 온라인마케팅의 타겟인듯 했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개로 '업을 이끄는 리더들' 집단이 이고, '업을 이끄는 이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좇는 이들'이 있고, '업을 이끄는 이들을 알아봤다라고 착각해서 헛짓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마지막 집단군은 다시말하자면 '사짜들을 못 알아보고 좇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정도의 사람들이 항상 온라인 시장을, 업의 현장을 정말로 '바꿨다'정도로 말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집단군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바꾸었겠냐싶지만, 사실 세상은 현명한 이들과 현명하지 않은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크게 변화한다(긍정적 방향이든 부정적 방향이든). 현명한 이들만 있다면, 그저 극도의 발전만 있거나, 극도의 현상유지만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난 이런 극한의 발전 또는 극한의 현상유지가 건강한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보통은 제대로 아는 자들의 스태미너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스태미너가 뛰어나다. 제대로 아는 자들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한참 멀었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99%이니까.(이건 자신감, 자존감과는 별개다. 우주를 열어본 자들은 본인이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말이 길어졌는데, 여튼 맨 위에 말한 다섯 집단이 A고, 그 다음에 말한 세 개 집단이 B라면, 넘사벽의 C집단이 존재한다. 근데 내가 이 사람들에 대해 어렴풋이 감만 잡히지,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온라인에 그렇게 상주하지도 않고... 이 사람들은 나에게 늘 간접경험뿐이었다.

 뭐랄까 A 집단이 '구매력 있는 집단(ex. 쿠팡 등에 존재하는 무언가. 특가로 나온 무언가. SNS 바이럴 된 무언가를 구매)'이라면, B 집단은 '시장의 메커니즘을 바꾸는 집단(ex. 인스타그램 쇼핑 기능을 촉발시킨 이들. 인플루언서라는 개념을 발족시킨 이들. 1인 미디어의 힘을 미리 알아본 이들)'이고, C 집단은 글쎄... '세상의 메커니즘을 바꾸는, 때로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버리는 집단'이라고 해야할까?

 여튼 이러한 집단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게되었고, 이들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지금 당장 '어떤 콘텐츠가 먹힐지'가 어느정도 보였다. 조금 더 과장해서, 딱 내일의 흐름에 대해 약간 배팅할 수 있는정도라고 할까. 그리고 그걸 토대로, 설계를 할 수 있었다고 해야할까. 난 내가 본 것들을 입증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내가 사람에 대해 바로 이해를 했는지 알고싶어서, 관련된 콘텐츠를 바로 만들어내려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에 대해 접근할수록, 콘텐츠를 만들어내려 할 수록, 나는 부족함을 느꼈고 한계를 느꼈다. 부족함은 내 부족한 '디자인 실력'이었고, 더욱 부족한 것은 '저작권', '레퍼런스'에 대한 써포팅의 부재와, 힘든 것은 대행사답게 클라이언트사의 합당하지 않고 놀리적이지 않은 '요구'였다.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게 아니라,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B2B 입장에서 뒤의 B에 속하는 업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게 아니라, 그저 엉성하게 만들어낸 높은 수치와 편차가 큰 그래프를 통해 앞의 B에 속하는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려 하는 것.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니 맘에 들면서 고객 맘에도 들어서 사람들이 이거 보는순간 막 사가고, 이거 본 대표도 막 기분 좋고, 이거 본 업주들도 막 기분 좋고, 막 다 같이 윈윈해서 다 같이 맥주 한 잔 짠짠 하기 좋은 콘텐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리가 없었다. 각자의 목적이 다른데, 집단의 목적과 행동의 근거는 다른데, 단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만족 시키려하니. 나는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끼며, 지금 이건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형상화하고싶은 그 무언가 덕분에, 난 항상 발전했고, 개선되었고, 절망했다. 그리고 늘 그렇게 결핍을 느끼며 바둥바둥 움직이게 되었다. 다양한 곳에서 결핍을 마주할 수 있었고, 다양한 곳에서 당당한 나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며, 다양한 곳에서 한참 부족하고 어리석은 나를 볼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늘 생각했던, '지금의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할 수 없었던게 아니고, 그 당시의 내가 만들어낸 최선의, 최고의 결과물이었지 않았나싶다.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취했고, 그 목적에 맞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지 않았나싶다. 못한게 아니고, 그 때 당시의 경험선에서의 '다 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보석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다양한 보석이 모이게 되었다.


 나의 큰 장점. 높은 러닝커브. 이 덕분에 나름 보석을 어느정도 조금씩 깎을 수 있게 되었고, 지금에서야 이 모인 보석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 보석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이것들을 그러모아, 내 총체를 담은 어떤 '무엇'을 형상화하고싶다는 것.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내 모든 지식과 지혜와 애정을 쏟아부어서 그 어떤 '무엇'을 만들어내고, 아니 설계하고 싶다.




그리고 이건 결국, 내가 마주쳐왔던 말들로 하자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요.'

'생각이 100% 손실없이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발견하고 싶어요.'

'사람의 인지과정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사람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해서 그들을 행동을 '예측하고 설계'하고 싶어요.'

였고,



이것들은 결국, 요즘말로 하면, 브랜딩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공감하는 것에, 내가 동의하는 것에, 나를 담아, 그 어떤 '무엇'을, 그러니까 그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형상화시키고 싶었던 것이고, 그 것이 정말 완벽하게 목적에 부합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녔으면 했던 것이었다.


10년 아둥바둥 살아온 결과,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브랜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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