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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드니의 살아있는 뮤즈

이튿날 아침, 프랑수아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여서 그랬는지 19세기의 고풍스러운 창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비추지 않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킴이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준비해 놓았다.


“프랑수아,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네? 어제 좀 피곤했어? 설마 어제 파스타 하느라 기진맥진해진 것은 아니지?” 장난기 어린 마리-킴의 미소는 언제나 사랑스럽다.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가 삐삐 머리 인형을 연상시킨다. 프랑수아는 마리-킴이 뽑아준 에스프레소에 라빠르쉐 각설탕을 하나 넣어 휘휘 저은 후 단숨에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분주한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각자의 일터를 향해 아파트 문을 나선다. 아파트 공동 현관 로비에서 간단한 키스를 한 뒤 두 연인은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진다. 마리-킴은 13구에 위치한 프랑스 국립 도서관으로, 프랑수아는 6구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한다. 오늘도 옅은 베이지색 셔츠를 입은 마리-킴의 뒷모습이 프랑수아의 시선에서 멀어져 간다.


마리-킴과 헤어진 뒤 일터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던 프랑수아의 머릿속은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 복원에 대한 생각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오늘 복원실에 돌아가 복원팀장 루이에게 복원에 소요되는 시간과 예상되는 프로세스를 물어 서류로 정리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복원 전과 후의 마르트 얼굴도 면밀히 촬영을 해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로 남기기로 다짐한다. 그림 속의 인물이지만 실존인물이기도 한 마르트의 얼굴로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현상이 마음 한편에서는 ‘이상하다’고 느낀다. 마르트가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르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걸까? 프랑수아는 내심 마리-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간밤에 보았던 마리-킴의 수척한 얼굴과 핑크빛 화색이 도는 마르트의 얼굴이 프랑수아의 머릿속에서 대조되어 펼쳐진다.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학예실을 거쳐 필요한 서류와 필기도구를 챙겨 복원실로 발걸음을 바삐 옮긴다. 루이에게 복원과 관련되어 확인할 사항들을 신속히 체크하고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 종종걸음으로 지하에 위치한 복원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프랑수아의 마음은 이상하게 설렌다. 라벤더 밭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흰색 나비의 몸짓처럼 복원실로 향하는 프랑수아의 발걸음은 가뿐하다.


복원실의 두꺼운 철제문을 힘껏 밀어젖히니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복원실의 희미한 불빛이 지하의 복도로 스며들어 나온다. 루이는 프랑수아에게 손짓하여 가까이 오라고 지시한다. 복원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모리스 드니의 작품은 지하의 어두운 공간에서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루이가 눈짓으로 사인을 보내니 복원사가 복원을 위한 특수 조명을 켠다. 갑자기 밝아진 조명 아래에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는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내 복원사들이 작업 시 늘 착용하는 마스크 아래로 “우아!”라는 탄성이 새어져 나온다. 프랑수아도 복원사들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밀어 마르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제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마르트의 초상은 유난히 생기 있어 보인다.


루이는 프랑수아의 요청대로 복원에 필요한 과정을 서둘러 브리핑해 준다. 이를 받아 적는 프랑수아의 손길은 바삐 움직인다. 필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마르트의 얼굴을 살핀다. 왠지 모르게 프랑수아의 시선을 따라 마르트의 눈길이 움직이는 듯한 생각이 든다. 작품을 향한 자신의 감상이 지나치다고 느낀 프랑수아는 루이에게 농담조로 말을 건넨다. “왠지 마르트가 저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이상하죠? 작품이 절 쳐다 볼일이 없잖아요.”


이어서 루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을 해준다.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는 짧은 곱슬머리의 루이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게, 정말 신비한 그림이야. 나도 어제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는데 주인공인 마르트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더라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어. 작가가 그렇게 사랑했다는 부인이자 뮤즈였다니 작품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분명 인상 깊은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어. 복원하고 나면 정말 더 아름다워질 것 같아. 인물이든, 배경이든, 모티브든, 더 살아 숨쉬겠지.”


프랑수아는 루이의 의견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정말 특별한 그림 같아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군요!” 루이는 마스크 위로 보이는 두 눈을 싱긋 웃으며 프랑수아를 바라본다. “그럼, 특별한 작품은 모두에게 특별한 감정을 안겨주지. 반 고흐의 작품에 모두가 매료되는 것처럼 말이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복원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루이는 팀원들과 함께 잠시 커피를 마시러 복원실에서 나갔다. 그들의 빈자리를 프랑수아가 홀로 지킨다. 함께 티타임을 하자는 루이의 제안에 프랑수아는 문서 작성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하겠다며 복원실에 남았다. 왠지 모르게 작품과 홀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다.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액자 프레임부터 인물, 배경, 캔버스와 액자가 만나는 모서리 등을 꼼꼼히 촬영하고 물끄러미 작품을 바라본다. 마리-킴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던 어제 저녁 시간이 피곤했는지 프랑수아는 그만 복원실 테이블 위에서 잠시 잠이 든다. 꾸벅꾸벅 고개를 고개를 떨구며 조는 프랑수아에게 누군가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프랑수아, 여기야, 이쪽이야.”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서있다. 복원실의 특수 조명을 받은 그곳에 마르트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바로 거기에서. 프랑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흔들며 마르트를 쳐다보고 자신의 손등도 한번 쳐다본다.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프랑수아를 보며 마르트가 소리 내어 웃는다. “하하, 프랑수아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무지 믿기질 않나 보네?”


“네, 맞아요. 설마 당신은….” 말을 차마 잊지 못한 채 두 눈이 동그래져서 마르트를 빤히 쳐다보는 프랑수아를 향해 마르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내가 누군지 잘 알지? 마르트야. 나를 쳐다보는 프랑수아의 눈빛이 나를 현실 세계로 불러 냈나 봐? 하하. 지금은 몇 년도야? 나는 그림 속에 1891년도부터 갇혀 있었어. 그날 이후로 늙지도 않고 이 모습으로 여태까지 액자 틀 속에서 살아 있었지. 그나저나 오늘 프랑수아의 착장이 아주 멋진데? 지난번에도 오늘 입은 네이비 컬러 재킷을 입고 왔었지? 프랑수아는 네이비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프랑수아는 타는 듯한 목에 침을 가까스로 삼키며 천천히 마르트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 깊이 파인 그의 두 눈동자는 당혹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떨린다. “지금은 2024년이에요.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가 제작되고 나서 133년이 지났어요. 많은 것이 바뀌었죠. 만국박람회 때 건축되었던 에펠탑은 지금은 상징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와요. 전망대도 생겼어요. 에펠탑 기억하시죠?”


“응 그럼. 그 흉측스러운 모습의 거대한 탑 말하는 거 맞지? 그 흉물을 보러 외국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말도 안 돼!”


“네, 맞아요. 잘 믿어지지는 않겠지만 에펠탑은 이제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어요. 1900년 만국 박람회 때 오르세 기차역으로 건축된 이 장소는 1986년 미술관으로 리노베이션 되어 지금은 파리의 명소로 자리매김했어요.”


가능하면 마르트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대화를 이어가는 프랑수아의 머릿속에는 수십 개의 질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어떻게 제 이름을 아셨나요?’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나요?’

‘이전에도 그림 속에서 나온 적이 있었나요?’

‘2000년대를 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리스 드니와는 행복했나요?’

‘당신은 불변하는 존재인가요?’

‘당신의 핑크빛 뺨은 물감의 피그먼트가 아닌 실제였던 것인가요?’


…….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프랑수아를 응시하며 마르트는 검은색 원피스 위에 걸쳐 입고 있던 플라워 패턴이 수 놓인 카키색 에이프런을 탁탁 털면서 말을 건다. “프랑수아, 궁금한 것이 아주 많나 보네? 이제 차차 알게 될 거야. 앞으로 복원실에 자주 찾아와. 나도 그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했고 프랑수아의 깊은 두 눈 속에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했거든. 이야기해 줄 거지? 나는 알다시피 그림 속에서 튀어나왔으니 말을 옮길 상대도 없어. 아비앙또(또 만나)!”


갑작스러운 인사와 함께 마르트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루이가 복원 결과로 추측했던 것처럼 마르트가 입고 있던 에이프런의 플라워 패턴은 채도 높은 마젠터 컬러였다. 만개한 짙은 수염패랭이꽃이 연상되는 마젠터 컬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윽고 복원실의 두꺼운 철문을 끼익 열고 들어온 루이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프랑수아의 어깨를 툭툭 친다. “프랑수아, 졸고 있었어? 피곤한가 봐?”


루이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프랑수아가 멍한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아 네, 잠깐 졸았나 봐요.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거든요….” 프랑수아와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돈 뒤 루이는 복원실 팀원들에게 작업 진행을 요청한다. “자 이제, 커피도 한 잔씩 마셨으니 일을 시작하자고!”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린 복원사들 사이로 프랑수아도 고개를 쭉 내밀고 마르트를 쳐다본다. 마르트의 온화한 시선이 프랑수아에게 머문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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