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색채 복원에 앞서 이전에 분리했던 캔버스 천을 다시 캔버스 틀에 부착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캔버스 틀 옆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그 뒤 캔버스 틀에서 마모된 부분을 메꾸는 작업에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인 만큼 이 작업은 막내 복원사가 맡아서 진행한다. 이어서 루이가 바니쉬가 벗겨진 그림을 들고 온다. 캔버스 틀과 그림이 그려진 천을 다시 재결합하는 과정은 세심하게 진행된다. 재결합 시 발생하는 탄성이 너무 과하면 오래된 그림 훼손될 수도 있으며 그렇다고 너무 헐겁게 결합시키면 캔버스 표면이 울퉁불퉁 울게 된다. 캔버스와 틀을 분리할 때 제거했던 못을 다시 재사용한다. 베테랑답게 적당한 탄성으로 캔버스 천과 틀을 결합시킨 루이는 물감이 갈라진 틈 위에 새롭게 덧칠할 물감의 바탕색이 될 흰색의 안료를 바르기 시작한다. 캔버스 천 쪽으로 몸을 굽혀 측면에서 캔버스 천을 바라보니 그 위에는 수많은 작은 크랙들이 산재해 있다. 루이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갈라진 틈 위로 퍼티를 바르듯 새로운 밑색을 칠한다.


루이가 바탕색 작업을 마무리할 즈음 프랑수아가 다시 육중한 복원실 철물은 무겁게 열며 들어온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루이가 진행하는 작업을 뒤에 서서 바라본다.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는 이제 흰색의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마치 상처 위에 연고를 듬뿍 발라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밑색 작업을 멈춘 루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옷에 닦은 후 복원실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한다. “채색은 이틀 뒤에 하자고. 밑색이 완전히 다 마르고 하는 게 좋겠어. 성급히 하는 것보다 천천히 공들여서 하자고.”


프랑수아에게 싱긋 웃으며 눈짓을 한 루이는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프랑수아를 향한 의심이 싹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담긴 따스한 눈길이다. 학예실로 돌아온 프랑수아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킨다. 노트북의 정지화면을 바라보며 루이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본다. 10년 전 복원실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머릿속이 이내 복잡해진 프랑수아는 착잡한 마음으로 허공을 잠시 응시한다. 프랑수아가 학예실로 복귀하기를 기다렸던 잔느는 프랑수아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자리로 오라고 가벼운 손짓으로 부른다. 오늘도 주체할 수 없는 백금발의 곱슬머리가 산발인 모습의 잔느는 코 끝에 좁은 돋보기 안경을 걸친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프랑수아, 복원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어?”


“바니쉬는 다 걷어냈고요. 그리고 갈라진 틈새 부분 부분에 밑색 물감을 발라놓은 상태입니다. 캔버스 틀에 다시 캔버스 천을 재결합시켰어요. 채색은 2일 뒤에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채색은 공들여서 천천히 진행할 예정입니다.”


“음, 그러면 꽤 시간이 앞으로 걸리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채색은 그쪽 팀에 전적으로 맡기고 프랑수아는 이제 전시 준비에 전념하는 것이 어때? 복원실에 너무 오래가 있는 것 같아.”


잔느의 예상치 못한 대화 전개에 프랑수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각을 추스르면서 대답을 한다. “근데 지난번에는 복원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라고 하셨잖아요?”


잔느는 빙그레 웃으며 프랑수아가 사뭇 귀엽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건, 매일 가서 복원팀처럼 일하라는 말은 아니지, 가서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익히고 오라는 말이었어. 지금 프로세스 확인은 거의 다 되었잖아. 채색을 프랑수아가 직접 할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에는 채색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그때 한 번 더 가서 확인하면 될 것 같아. 매일 거기에 가 있을 필요는 없지. 안 그래?”


루이의 말대로 잔느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오늘 정도면 어느 정도 복원의 큰 틀이 잡혔을 것을 예상하고 프랑수아를 자리로 부른 것이다. 잠시 멍해진 프랑수아는 별말 없이 잔느를 쳐다본다. 프랑수아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내는 핑크빛 화색이 도는 마르트의 얼굴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현재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잔느를 향해 일단 웃으며 대답한다. “네, 일단 그렇게 할게요. 채색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그때 복원실에 가서 마무리 작업을 확인하겠습니다.” 잔느와의 대화를 마치고 본인의 자리로 복귀한 프랑수아는 워드 프로세서 파일을 켜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앞으로 마르트를 어떻게 만나야 하지? 마리-킴에게는 어떻게 말을 꺼내지?’


오늘은 유난히 머릿속에 무엇 하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답이 없다. 뒤죽박죽 엉킨 사실들과 이야기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쳐가며 다양한 시나리오로 프랑수아의 머릿속에서 전개되어 간다. 프랑수아는 무엇보다도 퇴근 후 마리-킴을 만나 지금까지 일어난 마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복원실의 환영일까, 아니면 마르트 그 자체일까?’


자리로 돌아온 프랑수아는 마리-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마리-킴, 오늘 언제쯤 퇴근해? 나 오늘 마리-킴에게 할 이야기들이 있어. 지금 머리가 좀 혼란스럽네.” 20-30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프랑수아의 핸드폰 알림이 울린다. “오늘 늦지 않을 거야. 평소와 비슷하게. 무슨 일인데?” 프랑수아는 곧이어 답신을 보낸다. “응, 그건 만나면 이야기할게. 집에서 이야기해. 우리 둘만 있을 때” 곧이어 마리-킴이 회신을 보낸다. “응, 알았어. 오늘 그럼 간단하게 한국 라면을 끓여 먹을까?”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한국 라면’의 등장에 마리-킴은 도대체 어디서 한국 라면이 났을까?라는 의문점이 생기지만 프랑수아는 당장 질문하지는 않고 일단 알겠다고 대답한다. 퇴근 후 마리-킴보다 집에 먼저 도착한 프랑수아는 원형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본다. ‘한국 라면이라, 한국 라면은 무슨 맛일까? 뭐랑 같이 먹는 걸까?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뜨겁고 그렇게 매운 것인가’ 궁금증이 생겨 구글에서 검색해 본다. ‘한국 라면 페어링’, ‘한국 라면 콤비네이션’, ‘한국 라면 매운맛’ 등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로 검색을 해본다. 대부분의 검색 결과는 강렬한 붉은색의 라면 국물과 함께 놓인 ‘김치’ 혹 ‘김밥'의 사진 이미지로 등장한다. 김치는 많이 들어봤으나 김밥은 정말 생소한 모습이다. 김 속에 밥이 들어 있고 그 속에 다양한 야채와 고기가 들어있다고 한다. 한꺼번에 다양한 재료를 입 속에 넣어 씹는 맛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핸드폰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어 생각해 본다. 마리-킴에게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 걸까?


이윽고 마리-킴이 열쇠를 좌우로 돌리며 ‘드르륵 드르륵’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와 달리 사뭇 표정이 밝은 마리-킴은 환하게 웃으며 프랑수아에게 인사한다. “프랑수아, 나 왔어!” 상기되어 있는 마리 킴의 두 뺨을 보고 프랑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사랑하는 연인이 제공하는 행복은 이렇게 전염성이 크다. “마리-킴, 오늘 표정이 좋네!”


“응, 우선 라면부터 끓여볼까? 한국 라면은 좀 맵데. 프랑수아 먹어본 적 있어?”


“아니, 처음이야. 마리-킴은 어때? 아니 그 라면은 도대체 어디서 났어?” 프랑수아는 오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진다.


“응. 나 오늘 호기심에 사봤어. 점심시간 때 도서관 근처 마트에서 사봤어. 이 빨간색 라면이 인기가 많나 봐. 매울 신 한자가 쓰여 있네. 한번 먹어보자.”


프랑수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마리-킴의 행동을 살핀다.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을 찬찬히 지켜본다. 마리-킴은 오늘따라 유난히 들떠 보인다. 스토브에 냄비를 얹고 보글보글 물을 끓인다. 끓는 물에 면과 2종류의 라면 수프를 넣으니 집 안에 매운 냄새가 확 퍼진다. 마제 소바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매콤한 향기이다. 프랑수아로서는 견디기 힘든 매운 냄새이다. 그 이내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면서 프랑수아는 마리-킴을 향해 묻는다. “마리-킴, 이거 진짜 먹을 수 있겠어? 냄새부터 보통이 아니야!”


마리-킴은 싱긋 웃으며 “한번 도전해 보자! 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으로 컵라면으로 주기도 한데. 다른 사람들도 먹으니까 우리도 먹을 수 있을 있을 거야. 세상에 못 먹는 음식을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주겠어?”


마리-킴이 끓인 붉고 빨간색의 라면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면서 더 강렬한 매운 냄새를 집안 가득 풍긴다. 프랑수아는 자기 앞에 놓인 수프볼에 담긴 라면의 모습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강에 얇고 꼬불꼬불한 면발이 넘실대고 있다. 용기를 내어 젓가락으로 호로록 면발을 입 안에 끌어당긴다. 입안에 알딸딸한 강렬한 매운맛이 퍼진다. 너무 맵지만 은근히 중독적인 맛에 한차례 더 면발을 당겨 입안으로 넣는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듬성듬성 맺히고 등이 뜨거워진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리-킴을 바라보니 마리-킴은 별 탈없이 호로록 면을 잘 삼킨다. 물론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으나 프랑수아처럼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 “음, 맵지만 나름 맛있는데?” 마리-킴이 매운 정적을 깨며 한 마디 한다. “프랑수아는 어때?”


“웅, 나는 너무 맵고 입안이 마비되는 것 같아. 얼얼한데. 처음이라 그런가?”


마리-킴은 싱긋 웃으며 프랑수아를 향해 말한다. “맛있게 매운맛이라고 하더니 이 맛이 진짜 그런 맛인가 봐.” 그리고 물도 마시지 않고 또 한차례 라면 면발을 젓가락으로 올려 입안으로 가져간다. 프랑수아는 그 모습을 신기하듯이 쳐다본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리-킴은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는다. “사실은 말이야, 그동안 며칠을 고민했어. 나의 감정에 대해서. 왜 그리 『직지』에 대해 예민한가? 마음속에는 피하고 싶은 마음과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승리했지. 그래서 오늘 도서관 근처 마트에 가서 이 라면을 사 온 거야. 한국 사람들은 라면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래서 한번 먹어보고 싶었고.”


“응, 그랬구나. 용기 있는 선택을 했네. 선택 자체는 너무 잘한 것 같은데 이 라면은 솔직히 너무 매운데?” 매운맛에 쩔쩔매는 프랑수아의 솔직한 고백에 마리-킴은 싱긋 웃으면서 답한다. “프랑수아, 나도 처음 먹은 매운 라면인데 술술 먹는 모습이 신기하지 않아? 나도 평생 프랑스에서 살면서 프랑스 음식 위주로 먹었잖아”


“그러게, 사실은 마리-킴이 아무렇지도 않게 먹길래 너무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었어. 내가 알던 마리-킴이 정말 맞은가....”


“그지, 나도 내가 너무 신기해. 나도 모르는 한국의 DNA가 나에게도 있나 봐.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어. 아 그런데 프랑수아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야?”


프랑수아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흐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한다. “마리-킴,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말을 듣고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심한 비난은 피해 줘. 알겠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죄라도 짓고 왔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프랑수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리-킴의 두 눈을 바라본다. 깊은 밤보다 더 짙은 검은 두 개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지금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말해야겠다.




이전 09화 <말렌 공주 미뉴에트>의 새로운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