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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돌아온 겸재 정선의 화첩

겸재 정선의 명작인 <금강내산전도>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1970년대 독일 남부 지방 교외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됩니다. <금강내산전도>를 비롯한 겸재 정선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만폭동>, <구룡폭> 등이 속해있는 한 화첩은 1975년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한국인 청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여정은 당시 독일 쾰른대학에서 겸재 정선의 회화로 미술사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었던 유준영(전 이화여대 교수)씨가 도서관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Norbert Weber, 1970-1956)의 수도사와 금강산(In Den Diamantbergen Koreas)』(김영자 역, 푸른숲 출판)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한 뒤 유준영 씨는 『수도사와 금강산』의 저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오랜 기간 수도원장을 지냈던 독일 남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을 방문합니다. 혹시나 이곳에 가면 『수도사와 금강산』에 실린 그림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어려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975년 수도원을 방문한 유준영 씨는 수도원의 지하에 위치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문화재를 전시한 전시장에서 겸재 정선의 화첩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정말 역사적인 발견으로 그때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겸재 정선의 작품 21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됩니다. 발견 당시 비단에 그려진 겸재의 그림은 좀이 먹어서 곳곳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유준영 씨는 발견한 화첩을 촬영하여 슬라이드로 남겨 1970년대 미술 전문 잡지 <공간>지에 투고를 하여 화첩의 존재와 더불어 마침내 세상을 빛을 보게 된 겸재 정선의 작품 21점에 대해 알립니다.



유준영 씨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겸재 정선의 화첩을 발견한 당시 모습



겸재 정선의 화첩이 독일까지 흘러가게 된 연유에는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역할이 큽니다. 그는 1870년 남부 독일 바이에른 연방주 랑봐이드에서 2남 1년 중 차남으로 태어나 형과 함께 김나지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역사를 부전공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난 형제는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었고 이후 베버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들어가 원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당시 일제 강점기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한 성 베네딕토 분교회는 노동을 중시하는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규칙에 따라 조선인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문화를 연구하는데 열심을 내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1년 처음 조선땅을 밟은 베버 신부의 일행은 4개월간 조선 땅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1925년에는 세 번째 한국 방문을 하게 되면서 금강산을 여행하고 당시 찍은 290여 편의 사진을 바탕으로 기록영화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을 제작하여 독일에 소개합니다. 한국문화를 연구하고 기록하는데 열심이었던 베버 신부는 책의 도입부에서 '책의 독자들은 내가 고국에 품고 온 한국과 한국민족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식민 지배로 사라질 수도 있는 한국의 풍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화가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한국을 여행하며 봐왔던 풍광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한국문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베버 신부의 노력으로 인해 어찌 보면 문화재 약탈이 심했던 일제 강점기에 겸재 정선의 화첩은 독일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2005년에 영구임대의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반환 전까지의 과정이 수월했던 것은 아닙니다. 독일이 나치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회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불태웠기에 해외에서 수집해온 화첩은 소실될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또한 1980년대 복원을 위해 담당자의 거주지로 잠시 화첩을 옮겨두었는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화첩 역시 전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화첩은 화재 직전에 담당자가 독일 바바리아 주립 고문서연구소에 맡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머물며 뮌휀대에서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었던 선지훈 신부는 수도원 측에 겸재 정선의 화첩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당시 수도원 측은 별다른 입장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9년 미국 덴버 미술관의 케이틀렌 블랙 연구원의 성 오틸리엔 소장 정선의 진경산수화논문이 미술 전문지 <오리엔탈 아트>에 실리면서 겸재 정선의 화첩은 전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겸재 정선의 화첩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동양의 산수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콜렉터들의 러브콜이 미술 경매사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초 미술품 경매사 중 하나인 뉴욕의 크리스티(Christie's New York)는 당시 한화 50억 원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제안하며 겸재 정선의 화첩을 경매에 붙이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유래없던 상업적인 관심이 수도원에 쏠리게 되자 수도원의 사제들은 장로 회의를 수집하였습니다. 십 년 가까이 화첩의 반환을 끈질기게 설득한 선지훈 신부님의 의지는 수도원의 결단을 이끌어 냈습니다. 2005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 정선의 화첩을 대한민국 왜관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영구 임대의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2005년은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해였다고 합니다. 또한 겸재 정선의 화첩이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장소로 돌려보내준다라는 것이 반환 결정에 가장 강력한 모토로 작용되었다고 합니다.


화첩에 담긴 그림 21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 3점>

금강내산전도, 만폭동, 구룡폭


<지역 명소를 그린 3점>

연광정, 압구정, 함흥본궁송


<기타>

송학도, 낙조장유, 기려도, 유연천성, 노재상한취, 횡거, 고산방학, 배강, 풍파소처, 화표주, 초당춘수, 야수소서, 청우출관, 부자묘노회, 행단고슬


위의 리스트를 보면 <금강내산전도>, <만폭동>, <구룡폭> 등 현시점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겸재 정선의 대표작들이 화첩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 금강내산전도, 견본담채, 54.5 ×33.0㎝,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구룡폭, 견본담채, 29.5 x 23.5 cm,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 함흥본궁송, 견본담채, 28.8 ×23.3㎝,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정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인 <금강내산전도>는 공간의 사실적인 묘사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겸재 정선의 화첩을 서방세계에 널린 알린 덴버 미술관의 케이틀렌 블랙 연구원도 사실적이면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겸재의 회화 기법을 KBS와의 인터뷰를 통해 극찬했습니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화면에 고스란히 담으면서 동시에 금강산 곳곳의 특징들을 놓치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계곡 구석구석에 위치한 사찰과 암자를 작게 그리되 붉은색으로 채색하여 시각적으로 잘 보이게 하였고 자칫 푸른빛으로만 전면을 채색해 지루함을 줄 수 있는 구성에 악센트를 주었습니다. 깎아지는 듯 높고 가파른 바위산과 나무가 울창하게 펼쳐진 숲을 한 화면에 묘사하면서 나무 숲이 중앙의 바위산을 에워싸는 모습을 옆으로 넓적한 타원 형태의 안정적인 구도를 표현했습니다. <구룡폭>의 경우 세로로 긴 구도와 대담한 생략이 큰 특징입니다.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해 직선에 가까운 단순한 수직의 형태로 폭포를 표현했으며 폭포물이 떨어져 동그랗게 파인 부분인 구룡연도 심플한 타원형으로 그려냈습니다. 이 작품에 극적인 효과를 더 하고 폭포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겸재 정선은 폭포 뒤에 존재하는 우람한 바위산을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폭포 주변의 소나무는 붓을 눕혀서 표현하는 기법인 미점으로 단순하면서 힘 있게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작품 <함흥본궁송>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거주했단 함경남도 함흥의 본궁에 자리 잡은 소나무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작품 속의 소나무들은 이성계가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입니다. 겸재 정선은 그림의 왼쪽 상단에 "이 늙은이의 필력이 비록 굳세다고는 하나 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제작연도가 불분명한 이 작품은 위의 글로 인해 겸재 정선 말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나는 일만 년을 봄으로 삼고, 다시 일만 년을 가을로 삼기를 축원한다"라고 적어 소나무가 오래 살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압도하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소나무 세 그루는 본궁의 건물보다 훨씬 더 크게 그려져 있으며 소나무의 가지의 형상도 마치 번개가 치는 모습을 연상시키듯이 강한 정기를 품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소나무와 함께 그려진 본궁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도식화된 모습으로 작품의 주요 소재는 본궁이 아닌 소나무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소나무의 솔잎은 담채로 채색된 배경색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세밀하게 붓을 세워 표현했으며 소나무의 나무껍질 부분도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비록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화첩이지만 타국에서 한국 미술사에 대해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온 학자의 집념과 노력이 없었다면 겸재 정선의 화첩은 지금처럼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1970년대는 미술사를 전공한 교수님들이 미국보다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신 교수님들에게 미술사를 배우면서 미술관, 박물관 문화가 뿌리 깊게 내린 유럽인들이 기록을 중시하고 이를 잘 보관해 오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겸재 정선의 화첩도 기록을 중시했던 베버 신부의 성향과 수도원장을 지낸 베버 신부의 수집품과 기록물을 잘 보관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력 덕분에 발견 시점까지 수도원 전시장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릴 수 있었나 봅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서방 세계의 관심이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쏠렸을 때 수도원 측에서 미술품 경매사에 화첩을 넘기지 않고 대한민국의 왜관 수도원으로 이를 반환해 준 것도 정말 감사한 결정이었습니다. 겸재 정선의 화첩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는 현시점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 글은 <KBS 역사스페셜 – 수도원에 간 겸재 정선, 80년 만의 귀향>(KBS 2009.10.3. 방송)과 매일경제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 80년 만에 돌아온 `겸재 화첩`은 왜 국보가 못 되나(2022.07.28 기사)와 네이버 지식백과 <함흥본궁(咸興本宮)의 소나무>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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