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바위[4] _ 영세불망(永世不忘)의 바람

by 이탁

3_3. 농암각자(聾巖刻字)의 암각과 욕기정(浴沂亭)의 건립 - 멀어지는 원형(原形)


주마가편(走馬加鞭)일지 점입가경(漸入佳境)일지,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더 맞을 듯하다. 그 인식에 기름을 부어 심화한 것이 욕기정(浴沂亭)의 건립과 각자(刻字)의 암각(巖刻)이다. 이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부정적 파생 효과였다.


욕기정과 농암각자를 생각하면, 우리는 먼저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사백 년 비어서 내려온 바위에, 20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글자를 새기고 집을 지은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을 하였던 것일까? 사연이 있었다.


먼저, 시기적으로 앞선 농암각자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자료 5]를 다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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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이 ‘농암’바위, ⑫가 ‘선생’바위, ⑬이 ‘정대구장’바위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각자를 농암각자(聾巖刻字)라 불렀다. 용어의 의미는 다소 애매하다.


이 바위 글자는 언제, 왜 새겼을까? 오백 년 내려온 바위에 갑자기 이런 글자를 새기는 것은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이 각자의 암각 이유에 대해 이성원(李性源) 박사는 『퇴계에게 제자, 선생, 학교,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일제강점기에 퇴계후손들의 ‘농암 지키기’의 일환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극히 공감되는 언술이었는데, 나는 그 직접적 이유를 신작로 건설에 따른 애일당 이건(移建)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전술한 이성원의 책을 짚고 넘어가자. 이 책은 퇴계 관련서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기념비적인 글이다. 원래, 2020년 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이 주관한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추모행사>에서 강연한 저자의 강연 원고인데, 저자의 퇴계 해석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행사 별책으로 발간하고, 후에 증보 발간한 것이다. 일생 인문학에 매진한 저자의 공력이 함축되어 있는데, 유불선(儒彿仙)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과 특히 지역반가(地域班家)에 대한 해박한 견문을 기반으로, 퇴계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역작이다. 보는 눈이 부족한 필자는 아직 띄엄띄엄 보지만, 볼 눈과 머리가 되는 사람은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필자는 앞에서 신작로의 조성시기를 1914년에서 1919년 사이라고 추정하면서, 농암각자를 쓴 함산이 1923년에 졸한 사실을 하나의 추정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이제 그 연결고리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신작로 건설과 농암각자 건설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추정 고리는 두 곳이다. 하나는 신작로 건설로 인해 애일당이 이건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애일당 이건이 농암각자의 암각 게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고리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신작로 건설과 농암각자의 암각이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것이다.


먼저 신작로 건설로 인해 애일당 위치를 위로 올렸다는 것을 보자. 사실 필자도 20세기 후반 분천시대의 애일당 건물 위치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1630년에 중수한 위치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수 이후 다시 위치 이동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건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여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애일당의 이건 사실이 적혀 있었다. 가령 Cultural Heritage Wiki의 애일당 항목에는 “일제 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면서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런 기록들은 출처자료가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일어난 사실을, 근거 없이 저렇게 날조해 적을 이유가 전혀 없고, 또 애일당이 1630년 중수한 자리에서 다시 위치이동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포털의 기록은 사실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 애일당 이건과 농암각자의 바위 새김 사이에 인과관계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근거출처 없이 여러 포털 기록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그 옛터를 표시하기 위해 글자를 새겼다”고 되어 있다. 출처자료가 없지만, 각자의 의미와, 그 의미에서 파악되는 취지를 고려할 때, 역시 사실로 보아도 될 것이다.

각자 ‘농암선생정대구장’의 의미가 ‘농암선생의 정자 터가 있던 옛 전장(田庄)’이고, 의미에서 파악되는 취지도 ‘옛터’를 잊지 말라는 당부이며, 그것은 애일당 이건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를 새길 당시 애일당의 이건은, 신작로 건설에 따른 이건 밖에 없다.


요컨대 농암각자의 바위새김은 신작로 건설에 따른 애일당 이건이 계기이므로, 신작로가 나타나지 않는 1914년의 분천 측량자료를 일단 상한 연도로 잡을 수가 있고, 하한 연도는 함산이 졸하는 1923년이 되는 것이다. 농암각자의 조성은 1914년에서 1923년 사이에 이루어진다. 어쩌면 신작로와 같은 이유로 1914년에서 1919년 사이로 좁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14년에서 1919년 어느 해, 예안에서 분천, 토계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조성되고, 애일당을 이건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분천과 향중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몰려오는 개화의 바람, 자본주의의 힘은 압도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이미 봉건 유적을 받들어 보호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날, 새로 조성된 신작로를 걸어 애일당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게들, 시절이 심상치가 않네. 애일당도 그렇고, 선조의 유적 보존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네. 어쩌면 좋겠는가?”

“걱정입니다. 이러다가는 이곳이 애일당 옛터라는 것도 사람들은 모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바위에 ‘정자 옛터’라고 새겨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바위 훼손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바위글자는 드물지 않으니, 큰 흠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인가? 어떤가? 다들 다른 의견은 없는가? 그럼 그렇게 하세.”


글씨는 하계의 명필인 함산(函山 李康鎬 1851-1923)이 쓰기로 했다. 전술한대로, 이 각자의 암각은 이성원(李性源) 박사가 퇴계후손의 ‘농암 지키기’라고 파악한 것인데, 퇴계후손들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농암과 관련된 분천의 일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이들은 이미 수 년 전인 1913년 『농암속집(聾巖續集)』을 발간하는 일에도 나의 일처럼 힘을 더해, 그 발문(跋文)의 저자 두 사람, 효암(曉庵 李中轍 1848-1934)과 함산(函山 李康鎬)이 모두 퇴계후손이었다. 저물어가는 봉건의 시대에, 아니 이미 끝난 봉건의 시대에, 이들은 그 유산을 붙잡아 전력을 다해 수호하고 있었다.

며칠 뒤 그들은 석공을 불러, 전면의 잘 보이는 바위 세 곳에 글자 자리를 다듬어 만들고,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고 크게 써 새겼다. 하지만 봉건문화가 사라지고 한자도 잊히는 시대, 후손들은 그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모르는 것은 후대인의 몫, 그들은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소망을 담아 정성을 다해 글씨를 쓰고 새겼다. 달라지는 시대에, 후손들이 잊지 말라는 당부요, 원려(遠慮)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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