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욕기정 이야기를 할 차례다. 욕기정의 건립과정은 비교적 명확하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이 60년대까지 있어, 저 건물을 기억하는 분들도 아직 많을 것이다. 우선 앞의 <자료 1>을 다시 가져와 보자. 사진의 한가운데 농암바위 위에 날아갈 듯 세워져 있는 건물이다.
건축은 목적에 따라 짓기도 하고 세우기도 한다. ‘지은 건물’은 그 자체공간의 사용을 목적으로 하지만, ‘세운 건물’은 외적 목적이 강하게 들어간다. 남들이 보라고 짓는 것이다. 정자는 보통 짓는 건물이지만, 이 욕기정은 세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정자는 농퇴시비(聾退是非)의 여진(餘震)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시비가 도산서원 도회(陶山書院 道會)로 파국을 맞은 후, 농암후손들이 이 건물의 건축으로 그들의 주장을 이어나간 것이었다. 도산서원도회가 1931년 11월 17일이었고, 정자의 상량(上樑)이 1932년 4월이었으니, 도회 직후, 바로 건축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겨울에 강바람이 얼마나 차가웠을까? 정자골 선영(先塋)에서 나무를 잘라 오는 일을 또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제는 다 지나간 일, 시비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저 집을 짓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정자는 60년 초에 소멸되어, 30년 짧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필자는 저 건물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애일당 옆으로 돌층계를 조금 올라가면 바위 상부가 나왔는데, 중간쯤에 무너진 흙더미가 있었다.
소년에게 그런 것은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매미, 바위 밑에서 터 위까지 크게 자라 올라온 나무에서, 초여름 말매미가 무진 울었다. 옛날 초동(樵童)이 여울로 이색(耳塞)이 되어, 지게 던지고 돌아갈 일을 잊은 것이나, 소년이 매미로 이색(耳塞)이 되어, 책보 던지고 돌아갈 일을 잊은 것이나, 그거나 이거나 세상을 잊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무는 날도 잊고, 소년은 나무에 매달려 매미를 잡았다.
존속기간이 짧았지만, 욕기정은 의도하지 않게 농암바위의 존재에 대해서는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 위치 탓이었다. 그 위치가 바위 상부였다. 훼손되고 남은 본체바위는 상부가 곧 바위 전체였으니, 바위 전체가 집터가 된 셈이었다.
누가 집터를 농암바위라 생각하겠는가? 관심도 주지 않았다. 중간바위가 떨어져 나간 전면에는 나무가 자라 앞을 가리고 있어, 얼핏 바위 같지도 않았다. 바위지역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저 아래의 떨어져 나간 자암(子巖)을 농암바위로 부르기 시작했다. 위치나 크기가 그 정도면, 그게 농암바위일 것 같았다. 얼마나 초라하였으면, 이름까지 넘어갈까? 애달픈 농암이여, 쓸쓸한 농암이여!
부암(父巖)은 잊히고 자암(子巖)이 농암(聾巖)이면, 대를 이은 것인가? 주니어(junior)인가? 혹 그렇더라도 농암바위의 이름을 거기에 붙일 수는 없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