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바위[3] _ 단절과 차폐

by 이탁

3_2. 일제(日帝)의 신작로(新作路)와 농수로(農水路) - 단절(斷絶)과 차폐(遮蔽)


농암바위의 모습을 변화시킨 두 번째의 사건은 신작로(新作路)와 농수로(農水路)의 건설이다. 20세기 분천시대의 사진 두 장을 다시 가져와 보자. 앞의 [자료 1]과 [자료 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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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1]을 보면, 사진 중간쯤에 우에서 좌로 길게 지나가는 콘크리트 농수로가 보인다. 이 농수로는, 농암바위 앞에서 두 개의 취수탑(取水塔)을 거쳐, 좌측으로 빠져나가 분천으로 들어갔다. 아래 [자료 5]에서 잘 보인다. 우측 취수탑은 독립된 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우측 상단이 개방되어 있어, 거기까지 수로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두 취수탑 사이는 수로를 낮추어 지나가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 이런 모습이다.

농암바위 앞에서 물길을 낮춘 이유는 알 수 없다. 수리역학의 문제일 수도 있고, 유적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농수로 바로 아래로 분천에서 토계로 올라가는 신작로가 지나갔는데, 농수로는 이 신작로를 기반시설로 하여 만들었다. 위 [자료 1]의 좌측 중간 쯤, 소나무 언덕 아래로 분천으로 들어가는 약간 오르막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 길을 따라 필자는 도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저기는 이를테면 분천의 심정적 관문 같았다. 저기를 내려와서 애일당을 돌면 마을을 떠나는 것이었고, 반대면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 신작로와 농수로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모두 일제(日帝)가 조선을 경영한 강점기의 산물이다.


신작로부터 먼저 보자. 저 분천 토계 구간의 신작로의 정확한 조성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추정연도는 아주 근사치로 좁힐 수 있다. 상한, 하한 연도를 한정하고 추정할 수있는 두 가지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 상한 연도를 한정할 수 있는 자료를 보자. 1914년 일제가 분천을 측량한 기록이다. 다음이다.


[자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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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친 부분이 우리가 아는 신작로이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강변 쪽으로 붙어 지나가는 마을 옛길이 보인다. 그러니까 저 신작로는 적어도 1914년 이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분천의 옛길, 필자는 저 길을 처음 보았다. 저기는 일제가 만든 농수로가 지나가던 길이었고, 필자의 시대에는 양수장의 물길이 나가던 곳이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무섭게 물이 흘러내려가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곳이 분천의 옛길이었다니!


길은 ‘초(草)’라고 표시되어 있는 강변 언덕의 소나무 방풍림 지역을 옆으로 끼고 지나가, 낙동강의 분천 지류인 사구(絲溝 실거랑)를 따라 예안 쪽으로 송재 고개를 넘어 나갔다. 저 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안으로 가고, 안동으로 나갔을까? 분천 사람도, 토계 사람도, 원촌 사람도, 의촌 사람도, 모두 저 길을 걸어, 혹은 말을 타고 오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제는 마을 안쪽 밭으로 직선 신작로를 만들고, 사용하지 않는 옛길자리에는 후에 농업용 수로를 만들었나 보다. 밭에는 신작로를 내고, 옛길에는 농수로를 만들고, 문득 노래 하나가 생각난다.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 띄워라 노다 가세 (아리랑 타령)


그러면 신작로의 하한 시기는 언제인가? 그 추정단서는 농암각자이다. 후술하지만, 농암각자의 암각 동기가 바로 신작로 조성에 따른 애일당의 이건이었고, 각자의 글씨를 쓴 함산(函山 李康鎬 1851-1923)이 1923년에 졸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면 신작로 조성의 하한 연도는 1923년이다. 요컨대 1914년에서 1923년 사이에 이 신작로는 조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일화 하나를 적고, 이 기간을 좀 더 좁혀보도록 하자.


이것은 필자가 선친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1919년 3월 22일 2차 예안장터 만세운동이었던 모양이다. 선친은 당시 열 살 남짓한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다.


2차 예안장터만세운동은 격렬하여 일제의 발포로 십여 명 이상이 다쳤다고 한다. 분천의 소년들도 이미 만세운동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어, 하루 종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저물 무렵, 부내 앞 신작로를 따라 만세를 마치고 하계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할배’(택호를 잊었다.)가 밖에 나와 있던 부내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는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선친도 있었다.


“야들아! 어느 어른이 장하다고 그래라!”


‘어느 어른’도 택호(宅號)를 잊었는데, 하계 족보를 탐문하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른’은 일제의 발포로 총알이 사타구니를 치고 나갔다는데, 그 부상을 하고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저앉아 피를 흘리며 만세를 부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하였을까? 얼마나 비장하였을까? ‘할배’는 돌아가는 길에도 가슴이 터질 듯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라고 그 벅찬 마음을 몰랐겠는가? 오륙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선친의 음성은, 마치 그 ‘할배’인 양,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만세를 부르는 그 ‘어른’을 눈앞에서 보는 양, 어느덧 호기롭게 떨려 올라갔다. 진한 무용담이었다.


그 ‘할배’가 소리치며 올라간 길이 ‘신작로’였다는데, 그 신작로가 완성된 도로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이미 완성된 신작로였다. 전국의 많은 신작로들이 이미 이전에 만들어졌고, 또 이런 도로 공사가 쉽지 않았을 3.1운동 직후의 시대상황과 1923년에 졸(卒)하는 함산의 개인 상황을 감안할 때, 신작로는 3.1운동 이전에 이미 조성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들은, 필자의 선친이 직접 보고 들은 하계 할배의 일화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필자는 분천 토계 신작로의 조성을 1914년에서 1919년 사이라고 본다.




이제 농수로를 보자. 이 농수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가 없어, 정확한 조성 연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구조물이 신작로를 기반시설로 하고 있어 신작로보다는 뒤에 조성되었다. 부내 앞들 수로를, 신작로 조성 후, 사용하지 않는 옛길에 만들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농수로에 대해서, 분천의 여러 근대적 상황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희대 이종구(李鍾九) 교수는, 1927년 총독부령으로 발표된 ‘조선수리조합령’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면 농수로는 1927년 이후에 조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 농수로는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드는 구조물이다. 토계 근처를 지나는 낙동강에 보를 만들어, 십여 리나 물길을 끌어 분천까지 왔는데, 그 사이에 다른 농지지역이 거의 없었다.

분천의 농업용수용으로 이만한 구조물을 만들 경제적 가치가 있었을까? 분천 앞뜰은 광대하지는 않았지만 비옥하였다. 혹 분천의 생산 기대치, 예상치가 그 정도는 되었다는 것일까? 그런 이유라면, 일제의 산미정책(産米政策)은 얼마나 야물고 단단한 것인가?

이 물막이는 강 건너, 의인 섬촌 사람들은 수위가 낮을 때 강을 건너는 다리로도 이용하였는데, 높이가 높지는 않았지만, 낙동강 물 관리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물막이의 하류 좌우로 여러 마을이 산재해 있었고, 여름이면 흔히 홍수의 피해를 입곤 하였다.


여담이지만, 이 교수는 부내 출신인데 요즘 수몰된 고향이야기를 놀라운 감성으로 풀어내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언젠가 귀한 책으로 엮여 나올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란 얼마나 일차원적인가? 풍경이 달라지면 인식도 달라진다. 신작로와 농수로가 만들어지면서 저기를 보는 우리의 인식은 크게 변하였다.




신작로가 먼저 충격을 주었다. 그 높이가 대략 바위 아래 끝 지점쯤이었으니, 신작로가 농암바위를 직접 가린 것은 아니었다. 가리지 않았다고 무관하지는 않았다. 신작로는 그 모양과 기능으로 양편을 강력하게 갈랐다. 그게 문제였다. 그것은 바위의 정체성에 타격을 가했다.

우선 다음 사진을 보자.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탑재된 사진인데, 70년대로 추정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자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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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걸어가는 저 길이 바로 분천에서 토계로 가는 신작로이다. 저기는 농암바위에서 조금 올라간 지점인데, 조금만 더 가면 도산서원 입구인 곡구암(谷口巖)이 나왔다. 지금 도산서원 진입로는 뒤로 보이는 산 위 중턱으로 나 있다.


우리가 아는 이색암(耳塞巖)과 농암(聾巖)은 강의 바위였다. 그 탄생 자체가 앞강의 여울에서 비롯한 것이다. 강이 없고 여울이 없다면, 이색암이 없고 농암이 없는 것이다.

그 여울 소리가, 십청헌(十淸軒 金世弼 1473-1533)의 말대로,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막았고(世諠不到聾巖上), 여울 소리가 세상소리를 막은 그 농암바위의 경계가, 회재(晦齋 李彦迪 1491-1553)의 말대로, 속세를 벗어난 곳(聾巖境界超塵土)이 되었던 것이다. 바위의 정체성은 여울이 만들었고, 여울은 강이 만들었다. 자연바위였을 때는 모르되, 농암바위의 존재는 강이 만든 것이다.

바위 기슭의 집이 강각(江閣)인 것을 생각해보라. 그 바로 옆 취병산(翠屛山)의 암자가 병암(屛庵)인 것과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병암(屛庵)은 산의 집이고, 강각(江閣)은 강의 집이었다.

그 바위가, 물과 언덕과 산과 집과 어울려 만들어낸 풍경이, 안분당(安分堂 李希輔 1473-1548)에게는 영남 제일이었던 것이다(聾巖形勝冠南鄕).


신작로 이전에도 저기에는 물론 길이 있었다. 오랜 역사의 길이 있었다. 농암이 소요하고, 퇴계가 농암을 방문하기 위해 내려오던 길이었다. 지형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길과, 도로로서의 산업적 기능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 같겠는가? 또 사람의 인식이란 얼마나 눈에 좌우되는가? 시간에 좌우되는가?


어느 날 문득 저런 길이 만들어지자, 낯선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인식이 달라져 갔다. 옛길을 모르는 우리 세대는, 저 길의 좌측을 강의 영역으로, 우측을 산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신작로는 바위를 강과 분리시켰다. 이제 저 바위에 집을 지으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산각(山閣)이라 불러야 하나? 암각(巖閣)이라 할지는 몰라도, 강각(江閣)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작로란 그런 것이다.


혹자는 길 하나로 과잉해석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저기서 자란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인식이다. 단절까지는 몰라도, 분리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작로가 인식의 변화를 만들었다면, 농수로는 풍경을 직접 바꾸었다. 헌연도 그림과 [자료 5]를 나란히 대비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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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사진 하단부에 보이는 저 콘크리트 농수로는, 좌측 그림의 줄친 아래 부분을 가려버렸다. 아래 부분이 가려지면서, 바위는 우뚝한 수직바위에서 우측 다리 부분이 빈, 반 사다리꼴 수평바위로 바뀌었다. 좌측 그림바위와 우측 사진바위를 한 번 비교해 보라. 저 위용, 저 호기 다 어디가고 저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 바위 틈새로 나무가 자라 바위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필자는 앞에서, 농암바위 앞에서 수로 구조가 낮추어진 이유를 바위를 가리지 않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더 직접적으로는 아마 농암각자를 가리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농수로 건설 당시, 분천과 향중은 농암 유적 훼손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문화통치(文化統治)의 시기, 일제도 토반(土班)들이 결사반대하는 일을 굳이 진행할 이유는 없었을 것인데, 그 타협이 저런 구조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필자의 기억으로 십리 농수로 어디에도 저런 구조는 없었다. 농암 유적이 있는, 농암각자가 있는 이곳에서만 그랬다.


바위는 원형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전면이 떨어져 나간 사백 년 뒤, 하단부분이 가려진 것이다. 하단부분이 가려지면서 바위는 우뚝한 모습을 잃어 버렸다. 다시 사진과 그림을 대비해보라. 우측 사진바위에서 좌측 그림바위를 연상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무가 자라 앞을 가려서, 하나의 바위라기보다는 바위 무더기나 바위 지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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