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바위[1] _ 전면 바위의 붕괴

by 이탁

3. 농암바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다. 바위가 온전한 모습으로 유전되지 않고, 무너지고 깨어져 훼손되기 때문이다. 농암바위는 역사적으로 크게는 네 번, 작게는 다섯 번까지 그 모습이 변화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것이 그렇다.

우리가 [자료 4]와 [자료 5]에서 본 모습, 즉 20세기 분천시대의 모습은 이미 두 번의 변화를 겪은 모습이다. 세 번째의 변화는 일제강점기에 있었고, 마지막 변화는 우리가 목격한 변화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문화재이전사업의 일환으로 농암각자를 절단한 것이다.



3_1. 을사년(乙巳年) 홍수 - 전면 바위의 붕괴, 슬프고 대견한 자암(子巖)


농암바위를 처음 변화시킨 것은 을사년의 홍수다. 1605년 을사년 7월에 큰 홍수가 있었고, 낙동강 일대가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우선 다음 그림과 사진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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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대비하기 전에 먼저, 우측 사진바위는 전체 모습이 아니고, 대략 줄친 윗부분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뒤에 상술할 것이지만, 바위 하부는 신작로와 농수로에 가려져 있다. 좌측 그림바위가 수직적으로 우뚝한 데 비해, 우측 사진바위가 다소 수평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윗부분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좌측 그림바위가 농암바위의 원형(原形)이다.


그림바위를 먼저 보면, 바위의 구조가 보인다. 바위는 하나의 통으로 된 바위가 아니었고, 앞뒤로 크고 작은 서너 개의 바위가 겹쳐져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 사진바위와 비교하면, 그 구성이 보이는데, 가장 전면에 ‘농암’바위와 ‘선생’바위가 있다. 대략 ⑯번 ⑮번 부분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⑭번 바위가 있고, 제일 뒤편에 뒷산에 연결된 가장 큰 본체바위가 있다. 상부의 평평한 구조는 본체바위의 상부다. 이 서너 개의 바위가 앞뒤로 겹쳐 연결되어 있는, 이 전체가 농암바위인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바위에서 달라진 것은 ⑭번 바위 부분이다. 중상부분까지 올라가는 큰 바위가 중간에 있었는데, 그 바위가 없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정대구장’ 바위가 나타나 있다. ‘정대구장’ 바위는 그림에는 없다. 그리고 ‘정대구장’바위와 그 앞의 ‘농암’바위와 ‘선생’바위 사이에는 큰 사이 공간이 생겼다. 저곳을 아는 사람은 그 사이 공간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그 공간을 통해, 죄송하게도, ‘농암’바위와 ‘선생’바위에 올라가곤 했다.

보이지 않던 ‘정대구장’바위 나타나고, 그 앞에 빈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⑭번 바위가 저 자리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저렇게 큰 바위가, 저렇게 이어져 있는 큰 바위가 떨어져, 저 자리를 이탈하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했다. 바위가 강변에 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바로 을사년(乙巳年) 홍수였다. 1605년의 가을의 홍수는 그야말로 기록적이었다. 강이 지나가는 유역마다 심각한 피해를 입혀, 『선성지(宣城誌)』, 『영가지(永嘉誌)』, 『계암일록(溪巖日錄)』 등 여러 문헌에 그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영가지』의 제언(堤堰) 조에는, 안동부성(安東府城)의 낙동강 방제 둑이었던 포항(浦項)과 송제(松提)가 모두 무너져, ‘부성(府城)이 물에 잠겼고, 민가가 모두 유실되었다(府城沈沒民家蕩析)’고 적었다.


도산과 예안지역의 피해상황은 계암(溪巖 金坽 1577-1641)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에 잘 기록되어 있다. 7월 13일부터 23일 사이에 수많은 피해의 기록이 적혀 있다. 7월 21일자에는 예안 객관(客官)의 담장과 벽이 무너지고, 애일당(愛日堂)과 척금정(滌襟亭), 쌍벽정(雙碧亭)이 모두 떠내려갔다고 하고, 23일자에는 풍천 구담(九潭) 건너편에 시신 40여구가 떠내려 왔다고 기록했다. 참혹한 피해였다.

계암(溪巖)은 25년 뒤, 무너진 애일당을 중수(重修)하는 일에 참여하고 「애일당중수기」를 쓰는데, 거기에 ‘낙동강 수십 리에 걸쳐 남아 있는 집들이 거의 없었다(沿洛數十里公私廬舍稀有存者)’고 회상해 적었다.


홍수는, 계암의 말대로, 그야말로 이전에 없던 초유(初有)의 피해를 입혔다. 낙동강 유역 일대가 초토화되는 그 물난리에 농암바위는 괜찮았을까?


농암바위의 위치는 물이 불어나면 불어난 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치면서 쓸고 지나가는 자리였다. 자료사진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바위는 버텨내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애일당중수기」에 그 기록이 있다. ‘터가 부서져(破基)’라는 기록이다. 계암(溪巖)은, 을사년 홍수에 애일당의 ‘축대가 무너지고 터가 부서졌다(頹階破基)’고 적었다. 애일당의 터(基)가 농암바위였으니(巖以基), 터(基)가 부서졌다는 것은 곧 농암바위가 부서진 것이었다. 혹 바위는 무사하고, 그 위의 축대만 무너진 것으로 해석할지도 모르지만, 후술하는 기록들을 보면, 바위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이는 조근(損庵 趙根 1631-1680)의 기행기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조근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671년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곳곳의 풍경을 기록하여 「심도산서원기(尋陶山書院記)」로 남겼다. 홍수 66년 뒤고, 애일당 중수 31년 뒤다. 그는 도산서원을 나와서 가장 먼저 분천으로 가 애일당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글 서두에 적은 ‘유양온안(悠揚穩安)’이 그것이다. 거기서 그는 농암의 후손 이장한(李章漢)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장한은 애일당의 주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애일당은 농암바위 위에 있었는데, 을사년 물에 바위도 쓰러져 무너지고, 집도 떠내려갔다. 자손들이 옛터 아래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堂舊在聾巖之上乙巳之水巖頹而崩堂亦漂去子孫改搆於舊基之下云)


조근의 이 기록은 농암바위와 애일당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먼저 ‘바위는 쓰러져 무너지고(巖頹而崩)’라는 기록이다.


전술하였듯이, 농암바위는 앞뒤로 몇 개의 바위가 겹쳐 합해진 구조였다. ‘무너져 쓰러진(頹而崩)’ 바위는 어느 것인가? 그림바위와 사진바위를 대비하면 그것이 확인이 된다. 사진바위에는 그림바위에 있던 ⑭번이 없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정대구장’바위가 나타나 있다. ‘정대구장’바위는 원래 그림에는 없던 바위다. ⑭번이 떨어져 나가고 그 뒤에 있던 바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가장 전면의 ‘농암’바위와 ‘선생’바위, 그리고 제일 뒤편의 본체바위는 어떻게 무사하였을까? 본체바위는 뒤편 산과 연결되어 있었고, 전면의 두 바위는, 저기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래로 더 큰 바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림에도 그 모습이 보인다. 버텨내었던 것이다.


⑭번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바위크기의 빈 공간이 생겼다. 인식이란 얼마나 가변적인가? 사이가 비면서, 앞의 ‘농암’바위와 ‘선생’바위, 그리고 뒤의 본체바위는 별개의 바위로 인식되었다.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저 앞위의 바위를 하나의 바위로 보지 않았다. 우리도 그랬다. 원형을 모르면, 별개의 바위로 보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조근의 기록 ‘옛터 아래에 고쳐지었다(改搆於舊基之下)’도 ⑭번 농암바위의 붕괴를 함의하는 언술이다. 「애일당중수기」에는 ‘몇 보 남쪽에 옮겨지었다(移構迤南數步)’고 되어 있는데, ‘남쪽에’가 곧 ‘아래에’다.


이 진술은 애일당의 붕괴가 직접 물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만약 불어난 수위에 의한 직접 피해였다면, ‘아래에’ 옮겨 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애일당의 붕괴는 터의 붕괴로 인한 것이었고, 터의 붕괴란 곧 바위의 붕괴를 의미했다. 전술하였듯이, 붕괴된 바위는 ⑭번이었다.


애일당의 터 바위가 ⑭번이었다는 것은 그림으로도 확인이 된다. 앞에서 유념해 봐 달라고 한 부분이다. 바위의 왼쪽 상단 가장자리였다. 요컨대, 애일당의 붕괴는 ⑭번 바위의 붕괴에 따른 2차 붕괴였던 것이다. 「애일당중수기」의 ‘축대가 무너지고 터가 부서졌다(頹階破基)’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적은 것이다. ⑭번 바위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조금의 추정도 들어가지 않은, 기록이 보여주는 사실이다.


⑭번 바위가 떨어져 나가면서, 그 자리는 기울어져 다시 건물을 짓기가 불편해졌다(以舊基傾圯不便). 분천과 향중에서는 의견을 모아, 수보 남쪽으로 옮겨 짓기로 했다(謀移構迤南數步). 수보 남쪽으로 가면 지형상 약간 아래로 내려가는 위치였다(改搆於舊基之下). 애일당은 그 자리에 수백 년을 있다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조성하면서 다시 위로 위치 이동을 하였는데, 그것이 필자를 포함한 20세기 중후반 우리 분천세대가 본 건물이다.


지금까지 본 「애일당중수기」와 「심도산서원기」의 내용들, 즉 ‘축대가 무너지고 터가 부서져(頹階破基)’, ‘수보 남쪽으로 옮겨지었다(謀移構迤南數步)’, ‘바위는 쓰러져 무너지고(巖頹而崩)’, ‘옛터가 기울어 무너져(舊基傾圯)’, ‘옛터의 아래에 고쳐지었다((改搆於舊基之下)’ 등의 기록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직, 간접의 명백한 함의 하나는 바로, ⑭번 바위가 무너져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이다.


물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 거대한 바위를 떨어뜨리고 건물도 무너뜨렸다. 과연 기록적인 홍수였다. 중간의 큰 바위가 떨어져 나가면서 농암바위는 전면의 ‘농암’바위와 ‘선생’바위, 그리고 뒤편의 본체바위만 남았고, 무너져 빠져나간 자리에는 ‘정대구장’바위가 새롭게 나타났다. 20세기 분천세대인 우리가 본 모습이다.

훗날, 저 전면의 두 바위도 문화재이전사업으로 각자가 잘려나가면서 저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물의 힘은 어찌 버텨 내었지만, 인간의 파괴적인 무지의 완력은 어쩔 수가 없다. 아쉽고 슬픈 일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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