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2. 농암바위는 무엇인가? - 욕기정(浴沂亭) 터 바위
모든 기록이 그림의 저 바위를 농암바위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그러면 지금 저 바위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이란 물론 20세기 분천시대다. 정확하게는 1975년까지다. 후술하지만, 그해 안동댐 건설로 인한 문화재이전 사업으로 농암각자(聾巖刻字)가 잘려져, 전체적인 모습이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20세기 분천시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진즉 저 바위를 지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습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저 위치에, 저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욕기정(浴沂亭) 터가 된 바위다. 아래 사진의 ⑧번 바위이다.
[자료 4]
이 부분이 농암바위다. 명확하다. 문헌기록과 그림기록이 모두 완벽하게 저기를 농암바위라 말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 지형을 전체적으로 보면, ⑧과 ⑨는 산 아래로 드러난 암반이다. 우리가 강과 맞닿은 산의 하부 구조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농암바위는 저 암반 지형의 왼쪽 끝 부분이었다. 강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돌아나가는 끝 지점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상부가 아주 넓고 평평한 바위다.
다음 사진으로 좀 더 확대해 보자. 사진은 60년대 초에 안동의 대륙사진관 윤수암(尹壽巖) 선생이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역시 우리에게는 귀중한 자료사진이다.
[자료 5]
농암바위는 ⑩번 부분이다. 저 앞으로 ⑪, ⑫, ⑬번의 농암각자(聾巖刻字) 바위가 있는데, 후술하지만, 이 농암각자 바위도 농암바위의 일부였다. 농암바위는 농암각자 바위를 전면으로 하여, 뒤에 욕기정 터가 된 바위까지다. 그러니까 저 ⑩번 전체가 농암바위인 것이다.
사진의 모습은 이미 농암바위가 두 번의 큰 변화를 겪은 다음의 모습이다. 헌연도의 그림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후술할 것이다.
그림을 많이 보아서일까? 글을 쓰는 중에 자꾸만 헌연도 그림의 바위가 저 자리에 들어왔다. 앞의 나무가 사라지고 커다란 바위가 그 자리에 들어왔고, 욕기정이 없어진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악공은 음악을 연주했고, 누구는 노래하고 누구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음악소리가 바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는데, 농수로가 지워졌고, 신작로도 지워지고, 바위가 한참을 더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온 좌측 끝에 소담한 강각(江閣)이 보였다.
1547년 7월 어느 날 밤, 이슥한 시각에, 아이에게 촛불을 들려, 농암(聾巖)과 퇴계(退溪), 금계(錦溪)가 이 강각(江閣)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좁은 방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시게 경호(景浩), 오늘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어떠셨는가? 나는 좋았네만 혹 불편하시지는 않았는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것은 회계(會稽)의 고사(故事)입니다. 모두 상공(相公)께서 불러주신 덕분입니다.”
‘회계의 고사’는, 진(晉)나라 때 회계현의 명승지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명사 41명을 초대해 시를 짓고 유상곡수를 하며 놀았다는 고사다. 당태종이 좋아해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는, 이들이 이날 지은 시첩(詩帖)의 서문으로 왕희지가 쓴 것이다.
사방은 어두워 고요한데, 앞강의 여울 소리만 요란했다. 시끄럽지만 고요하고, 시끄럽지만 편안한 밤이었다.
생각하면 사람도 사실은 강산이 품었다가 내어 놓는 것, 농암이 여기에서 태어나고, 어부가가 탄생하고, 영남가단(嶺南歌團)이 태동한 것은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바위와 물과 산, 사람이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것일까?
자연의 오의(奧義)는 깊어서 알 수가 없는데, 문득, 전술한 조근(損庵 趙根 1631-1680)의 표현이 생각이 난다. 그는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이어 분천으로 내려와 애일당에 올라, 그 풍광을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잠시 올라 난간에 기대어 보니, 경물이 한없이 늘어서 있어, 사방이 새로운 모습이라, 천연대에 부족하지 았았다. 당 아래로 강물이 감아 흐르고 있어,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풍취가 있었는데, 이는 천연대의 멀리 탁 트인 것과는 그 기상이 아주 달랐다.(余暫登憑欄見景物森羅面面新態不减於天淵川流橫繞堂下有悠揚穩安之趣與天淵之曠遠通暢氣象頓殊矣)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함(悠揚穩安)’과 ‘아득하고 멀리 환하게 트임(曠遠通暢)’, 나는 이 차이에서 단번에, 노선백 농암(老仙伯 聾巖)과 도학자 퇴계(道學者 退溪)를 연상했다.
나는 두 분의 인생을 모르고, 자연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선의 강호가도(江湖歌道)가 난만(爛漫)히 이루어지고, 저기에서 조선의 도학(道學)이 순정(純正)하게 이루어진 것이, 그 차이가 그냥 우연이라고만 할까? 그 사람의 차이가 그냥 우연이라고만 할까? 뭔가 필연적인 소종래(所從來)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