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원형 _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

by 이탁

2. 농암바위를 찾아서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를 보다가 문득 농암바위에 생각이 미쳤다. 거기에 기록에 걸맞아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그림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2_1.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는 얼마나 실경(實景)인가? - 오래된 원형(原形)


바로 다음 그림이다. 화폭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압도적 존재감을 가진 바위가 있는 것이다. ④번 바위다. ⑤는 애일당(愛日堂)이고, ⑥은 강각(江閣)이다.


[자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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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천헌연도는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전체 이름은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이다. 병술(丙戌)은 1526년이고, 중양일은 음력 9월 9일이다.


당시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으로 재직하던 농암은, 경상도의 ‘점마차사원(點馬差使員)’, 즉 경상도의 목장과 말을 점검하는 임시 임무로 차출(差出)되어 경상도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길에 고향에 들러 부모님을 뵙게 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경상감사(慶尙監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안동 인근의 수령(首領)들에게 지시하여, 농암부모를 위한 축수연(祝壽燕)을 열게 되었다.

당시 농암의 부모가 모두 여든이 넘어, 당시로서는 드문 나이의 구경(具慶)이었고, 경상감사의 지시로, 안동 인근 수령들이 합동으로 주관한 행사였던 만큼, 잔치는 아주 성대했다. 인근 노인들이 초대되었고, 악공과 기생들의 동원되었다. 가을 좋은 계절이라, 잔치는 마을 전체에서 벌어졌다. 강변에는 차일을 쳤고, 분강 곳곳에는 배를 띄웠다. 애일당 주변에도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잔치는 성대하여 온 성안의 구경거리였다. 당시 이 일에 대해 쓴 박상(朴祥 1474-1530)의 서문(李輔德重陽壽親詩序)을 보면, ‘구경하는 자들이 온 성에서 나왔다(觀者傾城而出)’고 하고, ‘세상의 성대한 일(人間盛事)’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구경거리 성대한 분천 잔치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 분천헌연도인데, 그 그림 속 애일당 옆에 저런 바위가 있었다. 마을 앞의 강변과 같이 잔치의 무대가 되어, 사람들이 올라가 앉은 저 바위, 저게 농암바위가 아닐까?

문제는 그림의 신빙성이었다. 얼핏 봐도 기록과 비슷하였지만, 만약 관념성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라면, 사실의 확인 자료로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농암바위를 확인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실성의 확인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 그림은 얼마나 실경을 잘 반영하고 있을까?


먼저, 이 그림이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속한다는 점이 판단의 기본이다. 고려시대부터 실용적 목적으로 그린 이 화풍은, 조선 초,중기에는 잔치나 계모임 등을 기록해 기념으로 남기려는 목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주지하듯, 기록은 사실의 반영이 기본이다. 화풍으로 개별그림을 다 판단할 수 없지만, 일단 이 그림은 사실적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만 보면, 저 종택 뒤의 봉긋한 소나무 등성이, 저곳은 필자의 시대에도 분천마을의 시그니쳐(signiture) 같은 곳이었고, 마을이 수몰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다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저 그림의 사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문헌 자료들이 더 많이 있었다. 그것이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 「애일당중수기(愛日堂重修記)」 등이었다. 이 외에도 당시 시문(詩文)이나 편지 등도 참고할 수 있었다. 자료는 충분했고, 내용도 풍부했다.

이제 이 기록들로 저 그림의 신뢰성, 바위의 실체 등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은 1512년 처음 애일당을 짓고, 기념시에 병기(倂記)한 기록이다.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는 치사귀향(致仕歸鄕)한 농암이, 1548년 퇴락한 건물을 중신(重新)한 기록이다. 「애일당중수기(愛日堂重修記)」는 농암 사후, 1630년 무너진 애일당을 중수(重修)한 기록이다. 앞의 두 기록은 농암이 직접 썼고, 마지막은 오천(烏川)의 김령(溪巖 金坽 1577-1641)이 썼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중신(重新)한 1548년에는 위치 이동은 없었고, 축대와 건물만 가감했다고 한다. 1630년 중수(重修)할 때에는 위치를 남쪽으로 ‘수보(數步)’ 이동하였다(移構迤南數步).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기록들은 모두 애일당 건물에 대한 기록이다. 애일당을 처음 짓고(建立), 고쳐 짓고(重新), 다시 지은(重修)한 기록이다. 애일당에 대한 기록이 농암바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애일당의 터가 농암바위였다.


우선 우리는 분천헌연도 그림의 애일당이 최초로 건립한 애일당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최초 애일당 건립에 대한 기록이 「농암애일당」이다. 처음 집을 짓는 기록답게, 집터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농암바위다. 앞에서 농암바위를 확인하면서 인용한 내용을 다시 가져와 그림과 대비해 보도록 하자.


ㄱ. 선대가 분천에 거주한 이래,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자제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놀았다.(自先世卜居以來每於佳辰令節率子弟遊于此)
ㄴ. 바위가 집에서 동쪽으로 1리쯤에 있는데, 높이는 몇 길 남짓 되고(高數丈餘), 위에는 20여명이 앉을 수 있다(上可坐二十人).


다시, ㄱ과 ㄴ을 정리하면, 농암바위는 높이가 ‘수장(數丈)’, 즉 10여 미터가 되어야 하고, 바위 모양이 ‘자제들과 같이 놀 수 있는’ 평평한 모습이어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스무 명이 앉을 수 있는’ 바위여야 한다.

그림 바위를 보라.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만족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을 문자로 기록한 듯했다. 더욱 ‘스무 명’은,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십여 명이 바위 위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러면 이제 애일당 건물에 대한 기록을 통해 농암바위를 찾아보도록 하자. 곧 나오지만, 애일당의 집터가 농암바위이고, 그림에도 애일당이 있어, 이를 대비해 살펴보면, 농암바위나 애일당의 상황, 나아가 그림의 사실성을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ㄱ은 「농암애일당」, ㄴ과 ㄷ은 「애일당중신기」 내용이다. 전술했지만, 중신(重新)할 때에도 집터의 이동은 없었다. ㄹ은 농암이 치사귀향(致仕歸鄕) 후 분천에서, 영천과 안동의 구로회(九老會) 때 지은 시를 차운해 지은 ‘차화목영천속회창수운(次花牧永川續會唱酬韻)’의 한 구절이다.


ㄱ. 바위로 터를 하고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집을 지었다.(巖以基疊石爲臺作堂其上)
ㄴ. 당은 집 동쪽 1리 영지산 기슭 높은 바위 위에 있다.(堂在家東一里靈芝山麓高巖之上)
ㄷ. 조금 증감하여 집의 높이는 바위 위와 나란하게 하였는데, 바위 위에 대가 있고, 대 위에 또 대가 있어, 우뚝 솟아 마치 층탑 같다.(稍加增損堂之高與巖齊而巖上有臺臺上又有臺矗矗如層塔)
ㄹ. 농암은 옛날과 다름없고, 농암 위에 집이 있다.(依舊聾巖巖上堂)


기록의 바위는 물론 농암바위이다. ‘바위로 터를 하여(巖以基)’나 ‘영지산 기슭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靈芝山麓高巖之上)’, ‘농암위에 집이 있다(巖上堂)’은 더 설명이 필요 하지 않은 명시적 기록이다. 애일당의 집터는 농암바위이다.


농암바위는 ‘수장’과 ‘스무 명’으로 표현된 거대한 바위다. 그러면 애일당 집터는 구체적으로 농암바위의 어느 지점인가?

그림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농암바위의 왼쪽 중턱 조금 위였다. 그림을 참고하면 될 것인데, 거기에 축대를 쌓아(巖上有臺) 집 자리를 만들어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저 집터 자리를 좀 유심히 봐 두면 좋겠다. 훗날 저 자리로 인해, 애일당이 유실되고, 위치도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후술한다.


농암바위와 애일당의 기록을 통해본 그림의 신빙성은 무척 높았다. 교차확인이 되는 부분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 그림은 실경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림의 이런 특징은 그림 속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는 필자도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바로 ⑦번 부분이다. 농암바위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 옆 부분, 축대를 쌓아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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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 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축대를 쌓아 놓았는데, 만약 관념적으로 그렸다면, 절대로 저 위치에, 저런 축대를 그려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이 그림이 얼마나 사실 기록에 충실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우리는 기록과 그림을 통하여,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분천헌연도가 실경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농암바위의 변화과정을 살피는 데에 아주 중요했다. 바위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둘째, 그림의 바위가 농암바위라는 사실이다. 20세기 분천시대와 모습이 다르지만, 저 바위가 농암바위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바위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후술한다.


셋째, 최초 애일당 건물의 집터가 바로 농암바위라는 사실이다. 1630년 중수 시에 위치이동이 있었지만, 최초 건물의 터는 농암바위였다. 이는 애일당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역시 후술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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