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聾巖)이 바른 명칭이지만, 이 글에서는 사람의 호(號)와 구별하기 위해 ‘농암바위’라 하도록 한다. 농암각자(聾巖刻字) 바위 중, ‘농암’을 새긴 바위는 ‘농암’바위라 구별해 표시한다.
*출처를 따로 밝히지 않는 농암바위 관련 문헌 기록은 대부분 『농암집(聾巖集)』에 실린 것이고, 혹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인터넷 등을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자료다.
1. 왜 기록과 맞지 않을까?
1_1. 이색암(耳塞巖)과 농암(聾巖) - 세상 속으로
1_2. 왜 기록과 맞지 않을까? - 수 장(數丈)과 스무 명(二十人)
2. 농암바위를 찾아서
2_1.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는 얼마나 실경(實景)인가? - 오래된 원형(原形)
2_2. 농암바위는 무엇인가? - 욕기정(浴沂亭) 터 바위
3. 농암바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3_1. 을사년(乙巳年) 홍수 - 전면 바위의 붕괴, 슬프고 대견한 자암(子巖)
3_2. 일제(日帝)의 신작로(新作路)와 농수로(農水路) - 단절(斷絶)과 차폐(遮蔽)
3_3. 농암각자(聾巖刻字)의 암각과 욕기정(浴沂亭)의 건립 - 멀어지는 원형(原形)
3_4. 수몰(水沒)과 농암각자(聾巖刻字)의 절단 - 다시 자연으로
4. 농암바위 찬가(讚歌)
1. 왜 기록과 맞지 않을까?
어긋나는 기록과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간 일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진실은 늘 매섭고, 때로는 가혹하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늘 용기가 필요하고, 낯선 감정을 마주할 각오를 하여야 한다. 마음을 다잡아 다시 서두를 시작한다.
1_1. 이색암(耳塞巖)과 농암(聾巖) - 세상 속으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바위의 풍경은 분천(汾川) 제일이었다. 후술하는 인물 조근(損庵 趙根 1631-1680)의 표현을 빌리면,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함(悠揚穩安)’이다.
비암골에서 나무하던 분천의 아이들은, 오후 늦어서야 무거운 짐을 지고 마을로 돌아왔다.
어둡고 무서운 골짜기를 나와, 아이들은 바위에서 지게를 내려놓고 한숨을 돌렸다. 바위는 넓고 평평했다. 강 건너 의인 옛 현(宜仁縣) 언덕에 소나무가 일산(日傘)처럼 덮여 있었고, 저무는 노을 속에, 집집마다 저녁연기가 그림처럼 피어올랐다.
강을 좀 거슬러 올라간 곳에 여울이 있었고, 여울에는 관아(官衙)에서 통발을 쳐 두었다. 여울을 지나는 물이 그 통발에 부딪쳐 아래로 떨어지면서 그 소리가 아이들의 귀를 막았는데, 아이들은 지게도 잊고, 돌아갈 일도 잊고, 하염없이 그 풍경에 빠져들었다.
바위는 시끄러워서 조용했고, 시끄러워서 편안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귀먹바위(耳塞巖)라 불렀다.
분천의 영천이씨들은 오래전부터 이 바위를 사랑했다. 바위와 바위 주변의 풍광을 사랑했다. 아름답고 좋은 계절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자제들을 데리고 왔고 부모를 모시고 왔다.
입향(立鄕) 130여 년 후에, 입향조(立鄕祖) 이헌(李軒)의 현손(玄孫) 농암(聾巖 李賢輔 1467-1555)은 1512년 이 바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애일당(愛日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름 없던 이 바위에도 이름을 주어 농암(聾巖)이라 하고, 자호(自號)로 끌어와 사용했다.
농암(聾巖)은 곧 이색암(耳塞巖)이었다. 은둔해 자연을 따라 살며, 세상 평가에 구애되지 않으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바위는 이름을 얻어, 농암 따라 세상에 나와, 육백 년 여정을 시작하였다.
강가 마을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분천(汾川)에서 나고 자란 나도 저 분강(汾江)이 어린 놀이터였다. 맑은 강물과 깨끗한 바위, 반짝이는 모레는 보통의 수사(修辭)일 것인데, 큰물 지난 뒤, 바위마다 자라들이 그렇게 많이 올라가 있던 모습은 특별한 기억이었다.
두보(杜甫)의 ‘강촌(江村)’을 알고 난 뒤, 저곳은 늘 내 마음의 강촌이었다. “긴 여름 강촌은 일마다 그윽하네(長夏江村事事幽)”라는 구절은 어찌나 명료하게 다가오던지, 분강의 내 마음은 무구(無垢)하여 평화로웠다.
성인이 되고 분강의 사적(史蹟)을 조금씩 알면서, 나는 그곳을 새삼스럽게 보게 되었다. 가끔 옛 기록을 들추어 어린 기억과 맞춰볼 때면, 문득 아득한 옛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왔다. 은밀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했던가? 그 즐거움에 늘 제동이 걸리곤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게 농암바위의 기록이었다. 기억과 너무 어긋났기 때문이다. 왜 기록과 기억이 다른 것인가?
1_2. 왜 기록과 맞지 않을까? - 수 장(數丈)과 스무 명(二十人)
먼저 사진 하나를 보자. 출처와 작가 미상인 사진인데, 욕기정(浴沂亭)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32년에서 1960년대 초 사이의 사진이다. 욕기정이 실재(實在)한 기간이 그렇다.
수몰(水沒)이후, 집도 이건하고, 저 바위의 농암각자(聾巖刻字)도 글자부분만 잘라오면서, 이제는 저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이 사진은 20세기 중반 분천시대의 기록으로 참으로 중요한 자료사진이다.
[자료 1]
사진번호의 ②가 애일당(愛日堂)이고 ③이 욕기정(浴沂亭)이다. 욕기정 앞으로 마치 축대처럼 큰 바위가 비스듬히 흘려내려 신작로(新作路)에 닿아 있고, 그 앞으로 일제가 만든 콘크리트 농수로(農水路)가 중간이 끊어진 채로 사진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지나가고 있다. 농수로 앞에는 분천에서 토계로 이어지는 신작로(新作路)가 있는데, 그림의 ①번 바위 왼쪽으로 분천으로 들어가는 약간 오르막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 길을 따라 삼, 사백 미터만 가면 분천마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농암바위는, 저 큰 고구마처럼 생긴 ①번 바위다. 누가 특별히 지목해 말한 것도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저 바위를 농암바위로 알았다.
저 바위는, 필자도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농암바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농암바위라고 부르면 틀렸다. 말이 애매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우선, 저 고구마처럼 생긴 ①번 바위가 농암바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보자.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의 기록을 보면,
ㄱ. 선대가 분천에 거주한 이래,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자제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놀았다.(自先世卜居以來每於佳辰令節率子弟遊于此)
ㄴ. 바위가 집에서 동쪽으로 1리쯤에 있는데, 높이는 몇 길 남짓 되고(高數丈餘), 위에는 20여명이 앉을 수 있다(上可坐二十人).
ㄴ을 먼저 보자. ㄴ에는 두 가지 사실을 적었다. 높이와 바위 위의 넓이다. 먼저 높이를 보면, ‘몇 길’은 원문이 ‘수 장(數丈)’이다. 조선시대의 높이 단위에서 ‘장(丈)’은 3미터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바위의 높이는 대략 10여 미터 남짓일 것이다. 저 바위는 어떤가?
다시 좀 더 큰 사진으로 보자.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탑재되어 있는 자료사진이다. 1974년 안동의 영천이씨 고등학교 연합 화수회 학생들이 분천을 방문하여 바위에 올라간 사진이다. 어렸지만 필자도 기억하는 일이다. 뒤로 애일당이 보인다.
[자료 2]
바위의 하단부분이 잘려져 있지만, 이 바위의 높이는 잘해야 2-3미터다. 우리 세대는 너무 잘 아는 사실이다. 10여 미터는 어림도 없다. ‘스무 명이 앉을 수 있다’는 바위 위의 넓이는 어떤가? 사진을 보면 얼핏 가능해 보였다. 대략 보아도 서른 명은 넘게 올라가 있다.
이 부분이 사실, 이 바위를 농암바위로 오인하게 한 한 요인이다.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의 넓이면 농암바위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잘 분별해 보아야 한다. 바위 위는 넓이도 중요하지만, 모양이 또 중요했다. 그게 ㄱ이다.
‘스무 명’이 앉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제들과 더불어 놀 수 있는’ 바위여야 했다. 여기서 ‘놀 수 있다’는 것을 ‘바위 주변에서 논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된다. ‘바위 위에서 노는 것’이다. 저 바위 위에서 자제들과 놀 수 있겠는가? 서른 명이 올라가 있지만, 앞이 경사져 있어 놀 수 있는 바위는 아니다. ‘스무 명’이 앉는다는 것도 저렇게 촘촘히 붙어 앉는 것은 아니다. 빙 둘러앉는 것이다.
혹 세월 속에 외양이 달라졌을까? 강가의 바위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습은 그렇다 해도, 위치가 전혀 맞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지만, 농암바위는 애일당의 터가 된 바위이다. 애일당은 바위 한참 뒤 산기슭에 있다. [자료 1]과 [자료 2]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여러 가능성을 모두 열고 봐도, 저 바위가 농암바위일 수는 없었다. 위치, 높이, 상부의 모양 등 모든 것이 기록과 어긋났다. 저 바위는 농암바위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농암바위는 어디에 있는가? 주변에 저 정도의 바위가 없는데, 무엇이 농암바위란 말인가?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기록과 기억은 꽤 오랜 기간 불화상태로 있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