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자의 기억법 #1
그런 날이 있다.
몸은 심히 고단한데, 일말의 성취감인지 만족감인지 모를 형용하기 난해한 기분이 폐부 어딘가쯤을 살짝 간 보듯 스치는 그런 순간. 소싯적 (매우 드물게) 시험공부를 하다 과몰입한 나머지 볼펜의 잉크가 다 떨어지면 “에이 짜증나게”라는 말이 튀어 나오면서도 남모를 흐뭇함이 남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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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에 가는 곳이 여기다. 마제소바 혹은 아부라소바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맵싸하면서도 진득하고 크리미한 맛의 비빔면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기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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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진가를 아는 게 아니었는지, 이제는 서울 사대문 안팎에서 찾으면 4-5곳 정도 가게에서 맛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지화도 싫고 타협 따윈 안중에도 없는 곳은 여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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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긴자 뒷골목 어딘가의 눅진함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서늘한 푸근함을 느끼고 나면 비로소 그렇게 아버지가.. 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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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나무 같은 젓가락을 들어 무심하게 슥슥 비벼 입으로 가져가면 알 수 없는 거친 다정함이 온몸으로 엄습해온다. 퇴근길 회사 앞 포장마차의 멸치국물 베이스 우동이 따뜻한 엄마의 손길이라면, 이곳의 소바는 수고했다며 등짝을 내리치는 친구 둘째형의 솥뚜껑 같은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