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

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6

by 모래의 남자
아침 열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났다. 유주(柳州·류저우)를 북으로 하고 흘러가고 있는 강의 남쪽엔 병풍 모양으로 길게 산이 연결되어 있는데, 천연동굴이 99개나 뚫어져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시 방공호로 이용되고 있는 굴이다. 급한 대로 제5동굴로 갔더니 다행히 그 속엔 몇 사람 되지 않아 우리 일행이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작탄을 수없이 떨어뜨리는 모양이었다. 석굴이 심히 흔들리며 당장 무너지는 듯하고, 동굴 안의 상태는 천둥번개 치듯 불빛이 번쩍이며 천장이 내려앉는 듯 작은 돌 부스러기가 자꾸 떨어져 나는 허리를 구부려 제시의 몸을 방어하며 폭탄 투하가 멈춰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겁에 질린 일행이 머뭇거리며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리가 들어있었던 집 앞 뒤, 오른쪽, 왼쪽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동굴 문 밖의 넓은 밭에는 작탄이 떨어져 파인 웅덩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참혹하게 된 시신도 많이 눈에 띄었다.

<제시의 일기, 양우조·최선화>




광저우에 도착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임시정부는 다시 한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고, 어느새 광둥성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시의 공기에는 불안함과 조급함이 짙게 흘렀다. 더는 광저우에 머물 여유가 없다는 판단이 임정 내부에서 빠르게 굳어졌다. 다음 피난처를 두고 많은 의견이 오간 결과, 선택된 곳은 류저우(柳州)였다. 가장 빠르면서도 덜 위험한 곳이 필요했다. 다른 선택을 검토할 시간은 없었다.


광저우 인근 포산(佛山)에 머물고 있던 임정 일행은 1938년 10월 20일 새벽 전차를 타고 산수이(三水)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목선을 이용해 주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당 총통 장제스의 명령을 받은 광둥성 정부의 교통편 협조가 있었다.


피난길은 고난 속의 나날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일본군의 공습이 들이닥치면서 툭하면 배에서 내려 인근 숲으로 대피해야 했다. 동력이 없는 목선을 끌어줘야 할 기선이 갑자기 사라져 인력으로 배를 밀고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40일이 걸려 이들은 류저우에 도착했다. 광저우에서 류저우로 가는 물길은 중국에서 손꼽힐 만큼 풍경이 수려한 곳이지만, 임정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보다 공포와 긴장감이 훨씬 컸을 터다.

광저우를 떠나는 날 아침, 우중충한 날씨에 몸과 기분이 모두 무거웠다. 피곤했는지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헐레벌떡 기차역으로 향해야 했다. 기차를 놓치면 차표와 반나절의 시간을 날리는 것뿐이었지만, 100년 전 그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점심 나절이 돼 도착한 류저우는 조용하면서도 풍경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였다. 도시를 굽어 흐르는 강줄기와 곳곳에 솟은 기암괴석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봉우리에 내려앉은 짙은 안개는 운치를 더했다.

천천히 걸어 도심에 있는 낙군사(樂群社)로 향했다. 중국 광시성 정부가 임시정부 활동 진열관을 세워 놓은 곳이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외관은 어딘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을 줬다. 그간 보아왔던 무채색의 청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내부에는 여느 청사들처럼 임정의 발자취와 함께 한중 협력의 사료들이 대대적으로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임정이 류저우에 머문 것은 확실하지만 이곳이 실제 청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료는 부족하고 기억은 희미하며, 현장은 자주 그리고 쉽게 변형된다. 그래서 이곳을 둘러보는 동안 찾아들었던 감정도 확신보다는 조심스러움에 가까웠다. 되도록 믿고 싶은 마음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기분.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을수록 그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신중함이어야 할 터다.

기록에 따르면 임정은 류저우에서 일본군의 공습에 자주 시달렸다. 흐리고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일견 안전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일본군은 그만큼 더 많은 폭탄을 이곳에 떨어뜨렸다.


임정 사람들은 공습이 시작되면 인근의 어봉산(魚峰山)으로 대피하곤 했다. 산이라기보다 솟아오른 큰 바위에 가까운데, 군데군데 동굴이 있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폭탄 소리가 강물 위로 퍼지고 매캐한 연기가 능선을 따라 번져가던 그 시절의 장면이 자연스레 눈앞에 그려졌다.


공습을 상상하며 진열관에서 어봉산 동굴까지 직접 달렸다. 전속력으로 10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됐다.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단지 달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시간 동안 몇 발의 폭탄을 피해야 했을지,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스쳤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몰려나오는 인파를 헤치며, 더구나 중요한 물건 혹은 어린아이를 안아 들고 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어봉산 정상으로 올라가자 도시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였다. 풍경은 수려하면서도 묘한 불안감을 풍겼다. 이상하리만큼 어떤 곳도 안전해 보이지 않는 그런 풍경. 아마 당시의 임정 사람들도 같은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산을 내려와 유후공원(柳候公園)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한적한 공원은 류저우에서 설립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활동 현장이었다. 이들은 항일전선의 후방에서 고무·선전·공작·모금 활동을 펼치며 중국군과 독립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바탕으로 공동항일전선 구축의 필요성 즉, 함께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리려 애썼다. 이는 인구는 넘쳐나지만 전쟁에 나서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일깨우고, 한인 청년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그리고 훗날 이들은 충칭으로 옮겨가 한국광복군에 당당히 합류했다.


광복진선공작대의 류저우 시기 활동은 독립전쟁사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총을 드는 것만이 싸움이 아니었다. 20세기 전쟁사가 증명하듯 전쟁은 무기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전장의 앞뒤에서 동시에 함께 움직여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프로파간다의 중요성은 전쟁의 향배를 갈랐다. 한 발 앞선 정보의 입수, 심리를 흔드는 선전, 민심을 잡는 고무 활동은 전쟁의 그림자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임정은 1919년 공식 수립과 함께 정부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중 하나가 국경일 제정이었다. 가장 먼저 제정된 날은 3월 1일. 3·1운동의 독립선언을 통해 근대국가이자 자주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을 수립한 날로 확정한 것이다. 그래서 임정은 중국 각지에서 이동하는 고난의 시기 동안에도 매년 독립선언일 기념행사를 잊지 않았다. 국가의례를 주최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대내외에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939년 류저우에서의 삼일절 행사는 유후공원 인근 용성중학에서 열렸다. 현재는 작고 평범한 학교지만, 당시에는 한인들과 태극기로 가득했을 공간이다.


3·1운동은 국가가 아닌 시민들의 주도로 시작됐다는 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임시정부를 세우는 직접적인 계기이자 이후 헌법 정신의 토대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만약 그날이 없었더라면, 진정 스스로 독립 의지가 있었는지를 증명할 길이 마땅치 않다. 일본의 패망 이후 독립국을 주장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다. 그렇기에 그저 힘없이 태극기만 흔들다 다수가 희생된 무의미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지도를 펼쳐보면 류저우 서쪽에는 더 이상 물러날 만한 도시가 많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앞에 두고,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은 분명했을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압박감은 어쩌면 매일같이 떨어지던 포탄보다 더 무거웠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시로부터 20년 전의 3·1운동을 돌아보면서 당장의 내일조차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을 버텼다. 가장 미래가 불투명했던 시기에도 이를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겼다. 그것은 희망의 선언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