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5
군관학교·국립대학 기타 국립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한인에게는 어느 때든지 무조건 입학을 허가할 것이며, 군관학교 생도에게는 서적·식비·피복 등 일체를 무상 급여한다. 졸업 후 24개월간은 혁명군 복무 의무가 있지만 이 기간 경과 후에는 본인의 자유의사에 일임한다. 장래 한국을 위한 어떠한 계획을 도모할 경우에는 혁명군에서 경비 보조를 제외한 가능한 한의 원조를 제공한다. 단 군대의 원조는 국제적 분쟁을 야기할 것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다.
<고경(高警) 제134호, 불령선인 여운형 광동 체재중의 언동에 관한 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8년 7월부터 불과 3개월가량 머물다 떠났지만, 광저우는 사실 이미 전부터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1910년대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신해혁명 세력이 광동정부(호법정부)를 세우면서 이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광저우로 향한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베이징의 북경정부는 일본과 결탁했기 때문에 한인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광저우에서의 둘째 날, 쑨원을 기념해 만들어진 월수공원(越秀公园)으로 향했다. 공원이 조성된 관음산 기슭에 있는 쑨원의 옛 관저 터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당대 권력자였던 쑨원은 중국의 내전을 막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왕정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면서 현재까지도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공원 산길을 30분가량 기어오르니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길을 물어볼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싶은 생각으로 무작정 누빈 끝에, 수풀이 울창한 후미진 곳에서 기념비와 터를 발견했다. 오래전의 시간이 조용히 숲을 밀치고 다가오는 듯했다.
이곳이 바로 1921년 광저우에 특사로 파견된 임정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예관 신규식이 쑨원과 만난 곳이다. 그는 여기에서 쑨원을 두 차례 접견하고 5개 조항의 호혜조약을 제시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법정부를 중국 정통의 정부로 승인하며 아울러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2. 중화민국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함
3.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관학교 수용 허가를 요청함
4. 차관 500만원을 요청함
5. 조차지대를 허가하여 한국 독립군 양성에 도움이 되게 하기를 요청함
신규식은 이 자리에 임정 대표이자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으며, 이는 정식 외교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광동정부 국회는 한국 독립안을 상정해 통과시키고 광저우 주재 임정 대표의 파견을 허가했으며, 6개월간의 원조도 약속했다.
그도 나처럼 꽃가마 대신 땀 흘리며 맨몸으로 산을 올랐을 터다. 백범이 장제스를 만날 때처럼, 신규식 역시 쑨원을 만나기 위해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규식은 당초 3주 일정으로 왔지만 두 달 넘게 머물며 외교전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노력은 배신 없는 결과로 그렇게 이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후 신규식은 임정의 내부 갈등을 막지 못하면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개조파·창조파·현상유지파 등으로 분열된 임정 파벌을 중재하고자 끝까지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지병이 악화된 그는 스스로 곡기를 끊었고, 상하이에서 향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체로 우리는 외교독립론을 거론할 때 이승만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외교적 활동의 폭과 깊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예관 신규식의 이름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중국의 많은 혁명가들과 반제국주의 활동을 하면서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임정의 목표 달성에 적극 활용했다.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무장독립운동의 인재로 길러낸 것은 그의 손에서 시작됐다. 임정 명의로 작성된 외교문서와 선언문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고, 한국 독립의 국제적 정당성을 각국 언론에 기고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의 활동 기반을 닦은 것도 그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독립 외교의 사상적 설계자이자 국제 네트워크를 개척한 보이지 않는 외교 책임자였다.
월수공원을 떠나 황푸군관학교로 이동했다. 1924년 중국 국민당이 세운 육군군관학교지만 한인 무장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도착해 보니 광저우를 흐르는 강물 가운데 작은 섬,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여의도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출입의 통제와 보안 유지가 용이해 보였다.
군관학교는 커다란 2층 건물 3개 동이 연결된 구조였다. 내부는 학과수업이 이뤄지는 교실과 식당·내무반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근대식 군사교육시설의 모습이다.
1층에 마련된 전시관에서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 4기생으로 입교했던 약산 김원봉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의 이름은 군관학교 입구 비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곳에는 ‘김약산(金若山)’으로 새겨져 있다. 당시 그는 ‘최림’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공식 기록된 한인은 70명 이상, 중국 각지의 분교생까지 포함하면 200명 정도다. 하지만 김원봉처럼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고 국적을 숨긴 이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실제 입교생의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임정을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군관학교 개교 소식을 접하고 한인 청년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몽양 여운형은 장제스를 만나 무조건 입학과 피복·숙식·생활비 등의 제공을 약속받았다. 또한 학교 내부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던 한인들도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신규식이 닦아놓은 네트워크는 이 시기 다시금 빛을 발했다.
한인의 입학 우대가 이뤄지면서 청년들은 대거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황푸군관학교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터라, 한인들 역시 이념이나 소속에 상관없이 부담을 갖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무장투쟁 세력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많이 건너왔다.
한인 입교생들은 반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은 뒤 일정 기간 중국혁명군에서 복무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나면 자유를 얻어 독립운동 전선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김원봉을 필두로 이곳에 입교했던 의열단 출신들이 1938년 우한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훗날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한 점을 생각하면, 황푸군관학교는 무장독립투쟁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군관학교 뒤로 돌아가면 당시 사망한 생도들이 묻힌 동정진망열사묘원(東征陳亡烈士墓園)이 있다. 여기에서도 한인 입교생 두 명의 무덤을 만날 수 있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김근제, 충청북도 괴산 출신의 안태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교육을 받던 중 전투에 투입됐다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들에 대한 서훈보다도 지속적인 연구와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다.
광저우에는 황푸군관학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쑨원의 호를 따서 설립된 국립중산대학에도 많은 한인들이 입학해 고등교육을 받았다. 개인의 입신과 영달을 위해 유학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상당수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광저우로 넘어왔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학문의 공간을 활용해 사상 학습에 힘을 쏟고 독립운동 관련 문서나 출판물을 유포하는 등 독립 의식 고취 활동을 병행했다. 각기 단체를 설립하고 연대했으며, 중국의 반제국주의 세력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렇게 황푸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출신 한인들은 이후 독립운동 전선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동했다. 중일전쟁에 중국군으로 참전해 일본군과 직접 싸우거나, 공군학교에 들어가 파일럿 교육을 받고 전투기를 몰았다. 일본군에 침투해 갖가지 공작을 벌이고 후방에서 선전전에 나서기도 했다. 임정을 비롯한 주요 단체·조직에서 크고 작은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있었다.
이 과정의 형태는 모두 다양했다. 그리고 저마다 추구하는 이념과 사상 역시 달랐다. 조국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본다는 점 하나만 같았다. 방법론의 속도와 효용성을 두고 다툼이 존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잘못된 방향을 지향한 이는 없었다.
광저우의 골목과 언덕을 하루 종일 걸으며 그들의 자취를 더듬었지만,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흐릿한 표지석과 이름이 반쯤 지워진 묘비, 전시관 속 몇 줄의 기록들. 그러나 사라진 것이 많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시간을 오히려 또렷하게 만든다. 강물의 출발지는 모두 달랐고 서로의 물길은 때때로 충돌했다. 그럼에도 이곳에 잠시 모여 흘렀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결국 시선이 머문 곳은, 그들의 도착지가 아니라 도착을 향해 흐르던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