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3
5월 7일 장사(長沙·창사)에서 국무위원 김구와 군사위원 현익철·유동설·이청천 등이 무단히 반동분자 흉한 이운한이라는 자에게 저격을 당하여 현익철 위원은 현장에서 상중으로 운명하고 이청천 위원은 경상하여 자택에서 치료하고 김구·유동설 두 위원은 중상되어 입원 치료한 결과,
일삭 만에 다행히 구치되었는데 당시 본정부로서는 내무장이 책임하고 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당 지방 중국 당국과 협력하여 정범 이운한과 공모 혐의자 강창제·박창세·이창기·신기언·한성도·송욱동 등을 체포하여 중국 당국의 심리에 위임한 외에 범행 증거 조사와 부상한 이의 구호와 별세한 이의 상사에 대하여 전의로써 처리한 바,
중국 중앙당국에서도 이에 크게 관심하여 이 사건의 범행자를 엄중히 처리할 뜻을 당해 지방 당국자에게 명령한 외에 장개석 씨를 위시하여 간곡한 위문과 보조가 있었고, 중국 해당 지방 법정에서는 정범은 엄중히 처단하여 수감하고 혐의자들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하여 각각 전후하여 일괄 보석하였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
나흘간 머물렀던 난징을 떠나 후난성 창사로 향했다. 중국의 동부 연안을 벗어나 깊숙한 내륙으로 파고드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거리만 해도 900km가 넘는지라 기차로 한나절을 넘게 달려야 했다.
심신이 너덜해진 채로 기차에서 내리니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불쑥 찾아든 허기에 숙소 체크인도 잊은 채 식당부터 찾았다. 그러다 음식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二小姐 长沙菜馆’. 대충 해석하자면 ‘두 여인의 창사식당’쯤 되겠다.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도, 이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배가 고팠고 때마침 발견했을 뿐이다. 믿어주시라.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살펴보니 이름을 아는 요리는 거의 없었다. 일일이 찾아볼 기력도 없어 고기와 감자가 들어간 반찬 두 가지와 쌀밥을 주문했다. 대개의 중국 식당들이 그렇듯, 음식은 빛의 속도로 등장했다. 향긋하고 구수한 내음을 살짝 느낀 뒤 곧바로 전투적인 식사 모드로 돌입했다.
맛은 괜찮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혀끝에 매운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시작됐던 매콤함은 곧장 불지옥 같은 화끈함으로 변했다. 사천 요리가 얼얼함이 살아 있는 불맛이고 한국 요리가 은근하고 깊은 매운맛이라면, 후난 음식은 한 박자 늦게 치고 들어오는 강력한 뒷심의 매운맛이었다. 아무튼 생각 없이 간판 이름에 잘못 홀렸다가 아주 혼쭐이 났다.
실제로 창사를 비롯한 후난 지역은 매운 요리로 명성이 자자하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음식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향신료가 발달했다. 맵고 뜨거운 음식이 사람을 용감하고 씩씩하게 만든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그럴싸한 속설도 전해진다. 그렇게 용감해지다가 결국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도시에서 첫 끼부터 호되게 당하고 나니, 비로소 새로운 곳에 왔음이 실감 났다. 산세가 험하고 수풀이 우거진 이곳은 평지가 많고 바다가 가까웠던 지난 곳들과는 풍경부터가 달랐다. 뭔가 번잡했던 분위기도 조금은 차분하게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37년 일본군이 난징에 진주하면서 패배한 중국 국민정부는 충칭으로 옮겨갔고, 임정 역시 피난길에 뒤따라야 했다. 백범을 비롯해 100여 명의 임정 요인 및 가족들은 낡은 목선을 타고 거센 장강 물길을 거슬러 며칠을 고생 끝에 창사에 닿았다. 일본군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홍콩을 통해 국제 외교 활동을 시도할 수 있고, 곡물도 풍부하고 저렴해 비교적 생계 부담이 적은 곳. 그런 현실적 이유들이 창사를 임정의 새 거처로 만들었다.
창사에 도착한 백범은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수없이 바꿔가며 썼던 가명을 벗어던지고 본명 김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며 일견 후련함을 내비쳤다. 일제의 추격과 감시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전부는 아니었을 터다. 육신의 일시적인 편안함 따위가,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조국과 점점 더 멀어지는 피난길의 참담함을 가리지는 못했을 테니까.
매운 음식의 후유증이 가신 다음 날 아침, 임정 청사가 위치했던 서원북리(西園北里) 6호로 향했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임정은 당시 후난성 주석 장즈중(張治中)의 도움으로 비교적 번듯하고 규모 있는 건물을 빌려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이를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개발이 끝난 신도심의 한복판이었고, 깔끔하게 정비된 신축 빌라촌이 들어서 있었다. 오래된 시간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없었다. 임정로드를 따라 이동하면서 수없이 겪었음에도, 사라진 흔적 앞에서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시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상상으로 부풀려진 감상의 끝자락엔 언제나 짙은 공허함의 그림자가 남는다.
아쉬움을 모두 털어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전시관이 마련돼 있었다. ‘남목청(楠木廳)’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이곳은 사실 조선혁명당 본부로 쓰이던 건물이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이들이 이곳을 임정 청사로 오인하곤 한다.
전시관은 창사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은 식당과 주점, 화려한 상업 시설로 가득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성수동이나 연남동 골목 어딘가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명패를 바라보며 역시나 경건한 마음으로 입장을 하려는데, 이상했다. 분명 휴관일도 아니고 대낮 시간인데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이었다. 주먹으로 쿵쿵 두드려 봤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혹시 자리를 비웠나 싶어 30분을 넘게 기다려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며칠 전 전장 진열관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입니까?”
“아, 한국에서 왔습니다. 여기, 분명 열려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사람도 없고 잠겨 있어서요.”
중년의 남성 세 명과 여성 한 명이 길을 가다 말고 의아하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중 한 명이 자초지종을 듣고 잠시 살펴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별안간 목소리를 높여 상대방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사투리가 심해 제대로 엿듣지는 못했다).
자신들을 후난사범대 교수라 소개한 중년들은 전화를 끊고 난 뒤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관리인이 사정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곧 돌아올 것이라 했다. 이어 먼 길을 찾아온(숙소는 5분 거리인데) 훌륭하고 귀한 한국 청년(40대인데)이라며 앞 다퉈 추켜세우는 통에,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몸서리와 손사래를 동시에 쳐야 했다.
그렇게 관리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의 역사부터 현재 중국의 역사관과 한중 관계 등에 대해 원론적이고 담백한 수준의 대화가 오갔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중국인으로부터 이렇게 담담하고 조심스러운 어투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었다.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서 혹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말을 들었을 당시엔 별다른 울림 같은 건 없었는데, 나중에 떠올릴 적마다 묘한 공감이 찾아들곤 한다. 역사를 취사선택 없이 기억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사실을 구분해 기억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분들 덕분에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기념관 내부는 보존 상태가 깔끔했다. 여느 청사들처럼 사무공간과 침실 그리고 창사 시기의 각종 기록물들이 남아 있었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이는 이 목조 건물은 사실 임정 역사에서 굉장히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이다. 창사 시기 임정은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추진 중이었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당의 통합을 위해 1938년 5월 김구·지청천·현익철·유동열 등 거물급 인사들이 이곳 남목청에 모였다.
그런데 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중,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의 이운한이 갑자기 들이닥쳐 권총을 뽑아 들었다. 총성과 함께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현익철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고, 나머지 세 사람도 중상을 입었다. 특히 심장 가까이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백범은 인근 상아의원으로 급히 이송됐고, 대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른바 남목청 사건이다.
아직까지 정확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통합 과정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최근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암살 시도였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남목청에서 울린 총성이 단순한 내부 갈등 이상의 균열을 남겼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생각들에 잠긴 채 기념관에서 백범이 실려 갔던 상아의원까지 직접 걸어보니 2km가 조금 넘었다. 차량이 있었다면 모를까, 인력거나 사람의 등에 기대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면 꽤나 아찔한 거리였을 것이다. 흘러내리는 피를 막으며 내달렸을 그 다급한 순간의 장면들이 눈앞을 지나쳤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그 총탄이 외부의 적이 아닌 같은 독립운동 진영 인물의 손에서 발사됐다는 사실이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천 리 길을 달려온 이곳 창사에서, 차갑고도 낯선 총소리가 울렸고 탄환은 동지들의 가슴을 향했다. 창사의 매운 음식은 하루쯤 지나면 속이 진정되지만, 그날의 총성은 임정 요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내상을 남겼을 것이다. 신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불신이 싹트고, 어쩌면 서로를 향한 경계심이 독버섯처럼 번져갔을지 모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강변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으로 제법 선선했다. 속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어제의 매운맛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역사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쓰라린 상처도,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민낯도 결국은 삼키고 소화해야 할 우리의 지난 시간일 터다. 덮어 둔다고 사라지지 않고, 피해 가도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들.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모든 이들의 곁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