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2
인도에서 중경(重庆·충칭)에 도착한 김원영이 “중국군관이건 미국군관이건 우리 부대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출격 중 전사한다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끝나는 것이고, 살아있는 한은 적기를 한 대라도 더 격추시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할 것이다. 단지 바람이 있다면 적기를 격추시킬 때마다 내 비행기에 태극 문양을 하나씩 그려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독립신문 제7호, 1945년 7월 20일>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는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태동했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192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그 시초다. 약 4만 9000평 부지에 활주로와 격납고, 교육시설까지 갖춘 본격적인 비행학교였다. 대홍수에 따른 경영난 문제로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지만, 한인 스스로 세운 최초의 공군기지이자 비행사 양성학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곳 출신 조종사들은 한국 최초의 공군장교가 됐고, 일부는 중국 국민정부 항공대에서, 또 일부는 미군에 입대해 하늘 위의 전선에서 싸웠다. 이들을 기반으로 임시정부는 1944년 공군설계위원회를 결성하고 한국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추진했다. 미군과 합동으로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덕분이었다. 비록 온전한 형태의 공군은 아니었고 규모도 작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분명 하늘에서 싸울 수 있는 조종사와 전투기가 있었다.
난징에서의 마지막 날은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렇잖아도 끈적하고 습한 여름 날씨가 극에 달하는 느낌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괜스레 짜증을 냈다. 임정로드 일정도 반환점을 돌며 심신의 피로가 적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40분가량을 꾸벅꾸벅 졸며 달린 끝에 산자락 초입에 있는 종점에 이르렀다. 선잠에서 깨어나 보니 버스 안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중년의 기사 아저씨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곧바로 차를 돌려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항일항공열사기념관.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조종사들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역시나 중국 답게 넓고 웅장하게 조성된 기념관이었지만, 주말임에도 방문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인민해방군 관련 행사 같은 것들을 열 때나 사용하는 곳이겠지 싶었다.
전시물들은 그저 그러했다. 역사적으로 그리 인상 깊게 볼만한 것들은 없었고, 오히려 프로파간다에 심혈을 기울인 모습이었다. 중일전쟁의 주체는 현재 대만으로 옮겨간 중화민국이건만, 이곳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 공군기가 목 좋은 곳에 떡하니 전시돼 있다. 국민당 정부의 흔적까지 자국 역사로 품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오늘날 중국의 태도는 대범한 포용일까 아니면 교묘한 역사 왜곡이자 사유화일까.
루브르를 흉내 낸 외형의 전시관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상들을 뒤로하고 가장 높은 언덕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덕 정상에는 독립기념관 충혼탑처럼 생긴 쌍둥이 돌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었다. 그 뒤로 늘어선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검은 대리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것은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다국적 조종사들의 이름과 생몰연도다. 중국인 870명을 비롯해 미국인 2197명, 소련인 237명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석판에는 단 2명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었다.
한국열사명단(韓国烈士名單) A
전상국(田相國) 상위대장 1907년 - 1938년 8월21일
김원영(金元英) 소위비행원 1932년 9월6일 - 1945년 3월24일
황해도 신천 출신의 전상국은 일본 다치가와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에서 그는 중국항공대 일원으로 출격해 17번의 공중 운송 임무와 15번의 폭격 투하 임무를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 공로로 국민혁명군 제2대대 비행대대장까지 진급해 일본군과의 공중전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징에서 근무 중 1938년 장강 전투에 나가 공중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김보연의 아들 김원영은 열여섯 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백범 김구가 난징 동관두 32호에 마련한 학생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육군군관학교 19기생으로 입학했다. 이후 공군군관학교 15기로 발탁돼 쿤밍과 인도에서 항공훈련을 받았고, 이어 미국 항공학교에서도 상위권 성적으로 수료했다. 1945년 1월 그는 즈장공군기지의 미·중 연합비행단에 배속돼 일본군을 상대로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광복을 불과 다섯 달 앞둔 3월 24일, 경계 임무를 위해 출격했다 기체 고장으로 추락해 스물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전상국 그리고 김원영. 수천 명의 강대국 조종사들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름들. 타국의 하늘에서 조국을 위해 싸웠음에도 우리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그 둘 뿐만이 아니었다. 한인 출신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중화민국 공군 상위에 올라 일제와 맞섰던 권기옥이 있었다. 모스크바 비행학교에 들어가 소련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성장한 김공집·박태하·장성철·김지일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중국 혹은 소련 공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태극 마크’를 달지 못했을 뿐, 독립 의지와 자긍심만은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있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을 꺾고 독립을 되찾고 싶은 이들의 결의 앞에 어쩌면 소속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잊혔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놓지 않으려 했던 집념과 의지는 여전히 하늘 위에 남아 있다. 조국의 하늘을 되찾겠다는 꿈 하나로 타국의 전투기를 몰았던 청년들. 태극 문양 대신 별과 용, 망치와 낫이 새겨진 날개를 달았겠지만 그 비행의 방향과 목적지만큼은 하나였다.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 대리석 앞에서, 그들이 질주했을 하늘을 한동안 바라봤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스며든 한 줄기 햇살에 그들의 비행 궤적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