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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복판에 위안부 기념관이 생긴다면

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0

by 모래의 남자
1. 일본 정부는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고, 아베 내각 총리대신의 명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께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기로 하였습니다.

2.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부터 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하였습니다.

3.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위 1, 2의 조치를 착실히 이행할 경우, 이번 발표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하며,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하기로 하였습니다.

4. 또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점을 인식하고,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하였습니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 결과 발표문, 2015.12.28.>




중국은 일본에 대한 역사적 감정이 몹시 좋지 않다. 난징은 그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1937년 난징에 진주한 일본군은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 끔찍한 참상의 기록은 난징대학살기념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학살 대신 도살(屠杀)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강한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과거 교환학생으로 처음 난징에 도착해 택시를 탔을 때 택시기사와 나눴던 대화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난징대학교 가주세요.”

“응?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이요.”

“(액셀을 밟으며) 좋아. 만약 네가 일본인이었으면 곧바로 내리라고 했을 거야. 난 이 차에 사람만 태워.”


난징에서의 둘째 날, 최대한 단정하게 옷차림을 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숙소가 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느린 걸음으로도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한 곳은 리지샹(利濟港) 위안소 진열관. 빠듯한 일정에서 이곳 방문을 위해 하루를 올곧이 할애했다. 임정이나 독립운동의 유적은 아니지만, 여유를 갖고 천천히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둘러보고 싶었다.

리지샹 위안소는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에 설치한 위안소 40여 곳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그 자리에 2015년 세워진 진열관은 3000㎡ 넓이에 8개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건물 한 동마다 수십 개의 방이 들어차 있다. 내부에는 1600점이 넘는 전시물과 400여 장의 도면, 680장의 사진이 보관돼 있다.


진열관에 도착하자 가로세로 5m 크기의 정사각형 외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시아 전역에서 강제로 끌려왔던 위안부들의 흑백 사진이 격자로 새겨져 있다. 저마다 시름이 가득한 사진 속 그녀들의 애처로운 얼굴은, 차분했던 마음을 끝도 없이 침전시키기에 충분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당시 위안소로 사용되던 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화장대와 침상이 놓인 좁은 방. 그 안에서 두려움 속에 몸단장을 하고 지옥보다 더한 시간을 견뎌야 했던 여성들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점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밖에서 줄줄 흐르던 땀이 빠르게 식었다. 분명히 냉방이 가동되지 않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들이 늘어선 복도에서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이 굳었다. 방문 앞에 자신의 명패를 걸어두고 방으로 들어가는 일본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곧이어 새어 나오는 고통과 괴로움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허공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같은 환각은 방 내부를 들여다볼 때보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다가와 나를 괴롭혔다.

진열관 곳곳에는 모든 위안부 개개인의 사진이 걸려있고, 이름과 출신·국적 같은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다. 많은 이들이 중국인이었지만, 박영심 할머니를 비롯해 한반도 전역에서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끌려온 여성들의 얼굴도 보였다. 전시물의 설명글은 중국어·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일본어로도 쓰여 있다. 그 어떤 언어로도 이 야만의 역사를 외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훑고 지나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야속하리만큼 눈부시게 쏟아지는 여름날 오후의 햇살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중 양국의 역사 인식과 외교 전략의 차이를 가장 선명히 드러내는 주제다. 시점은 비슷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그 신호탄이 됐고 중국도 비슷한 시기에 이슈화가 이뤄졌다.


차이점을 보인 것은 그 주체와 성격 면에서였다. 한국에서는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한 운동이 벌어진 반면 중국에서는 정부·학계·언론이 사회적 논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한국이 인권과 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중국은 반제국주의와 애국주의 서사를 바탕으로 전쟁범죄의 책임을 강조했다.


한국 정부도 제도적 지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대체로 신중했다. 반면 중국은 의도된 역사 전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기념관을 세우고 국제 여론전을 강화했다. 그 결과 한국이 한일 위안부 합의로 엄청난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던 2015년, 중국은 리지샹 위안소를 복원하고 난징대학살 국가기념일에 위안부 전시를 열었다.


어느 한쪽의 방향성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지고 국가관계의 발전을 모색하면서 협상에 집중하는 한국, 정부 주도 하에 학계를 중심으로 일본과 대립 구도를 강조하는 중국 모두 각자의 상황에 맞는 전략을 선택했을 뿐이다. 다만 씁쓸한 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단순한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다.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은 난징 시내 한복판, 그 땅값 비싼 곳에 세워져 있다. 작은 소녀상 하나에도 난리가 나는 한국에서 그처럼 강력하게 망각을 거부하는 의지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양국 모두 진정으로 피해자들의 존엄 회복에 다가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눈치를 보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한쪽이나, 역사적 굴기를 위해 고통을 동원하는 다른 한쪽이나 본질에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역사에서 광기와 폭력의 칼끝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먼저 닿는다고 했다. 그 시절 위안부들을 구원할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전장의 총성보다 크지만 조용했던 울음은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언어로도 번역되지 못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고, 많은 이들이 광복을 전후해 생을 마쳤다. 그러나 살아남아 국가의 기둥이 된 이들 중에도 위안부 문제에 눈길을 준 이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우리 또한 그 침묵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그 시절의 독립이 진정한 해방이었다면, 왜 그녀들은 역사 속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까. 언젠가 서울 강남 대로변 한가운데에 이들을 위한 공간이 세워지는 날이 온다면, 그날 그 건물의 유리창에 비치게 될 것은 일본의 그림자일까 침묵해 온 우리의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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