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8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진강(鎭江·전장)에서 각 단체 대표를 소집하여 임시정부의 강화, 각 단체 간의 긴밀한 연락, 임시정부 변공서의 진강 이전, 상해 및 남경에 지부 설치, 병인의용대 및 의경대의 강화, 기관지의 부활을 의결하다.
<1934년 1월15일, 상해 및 남경 지역 조선인들의 사상 동향, 고등법원 검사 무라타 아리후미>
항저우에 이은 임시정부의 또 다른 피난처, 전장(鎭江)에 도착했다. 난징 교외의 작은 도시지만 나름 유서가 깊은 곳이다. 당송 시기 문학가들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고,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전투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동부 연안답게 경치 또한 고색창연한 곳이 많다.
하지만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가 문제였다. 9월 중순임에도 온도계는 아침부터 30도를 웃돌았다. 최고 기온이 39도에 이를 것이란 아침 뉴스를 보고 나니 길을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실제로 찜통더위에 돌아다니던 요 며칠은 날씨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넋이 반쯤 나간 채 걷고 있었고,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늘로 숨어들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장에서 방문할 곳은 단 한 곳,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이었다. 그 외에는 아직 발굴된 유적지가 없어 더 둘러볼 곳도 없었다. 난징으로 떠나는 오후 기차표를 끊어두고 무더위를 헤치며 진열관으로 출발했다.
기차역이 있는 번화가를 벗어나 걷다 보니 어느샌가 슬럼가가 나타났다. 3층 이상의 건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주택가는 으스스했다. 지저분하고 낡은 골목은 달려오는 오토바이 한 대도 위협적일 정도로 좁았다. 이따금씩 컹컹대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면 몸이 움찔하며 걸음이 빨라졌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이 더위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지도와 골목을 번갈아 확인하며 개미굴을 한참이나 헤맨 끝에, 사진에서 봤던 진열관 정문 앞에 도달했다. ‘진강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이라 쓰인 커다란 나무 간판과 깔끔한 외형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전장시 정부는 임정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으며 백범이 연설한 기록도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직 이를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전장에서의 활동 관련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있다.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나무 그늘에서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경건함을 갖고 차분한 기분으로 입장하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정문이 열려 있어 들어왔건만 한 개뿐인 진열관 건물은 굳게 잠겨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유리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내부였다. 텅 비어있는 것이 마치 방금 전에 이사를 나간 집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관람객이 한 명도 없고, 심지어 관리인조차 없다는 점이 수상쩍긴 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더위를 뚫고 이곳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진열관이라니.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운영 중이었다고 들었기에 이런 날벼락같은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허탈함으로 망부석처럼 몸이 굳어가던 그때, 어떤 여성이 탄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누구세요?”
“아, 한국에서 온 학생인데요(중국에서 신분이나 처지를 설명하기 귀찮을 땐 학생이 최고다).”
“아니,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뭐 하러 왔어요?”
“언제부터 이렇게 비어있습니까?”
“조금 됐어요. 진열관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디로요?”
“저도 여기 직원이 아니라서 잘은 몰라요.”
인근 주민 같았던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남긴 채 총총히 사라졌다.
이사를 간다니. 한국에서 사전조사를 나름 치밀하게 했지만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곧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시도했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 관리를 맡은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에 차례로 연락했지만 명확한 답변은 없었다. 국제전화인 탓에 담당자 연결은 원활하지 못했고,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만 되풀이됐다. 만약이라도 이들이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땅히 저 안에 있어야 할 전시물들은 대체 어디로 갔으며 지금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가. 한국에 돌아가면 곧바로 확인해야 할 일이 하나 늘었다.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잠시의 고민 끝에 전장시 인민정부 위치를 검색했다. 중국에서 인민정부는 시청·구청 등에 해당하는 관공서다. 물론 민원인 응대가 친절하고 수월할 가능성이 높지 않음은, 교환학생 시절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슬럼가인 이곳까지 오겠다는 택시는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을 걸어 녹초가 된 몸으로 인민정부에 당도했다. 사실 중간쯤 도심에 다다랐을 때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도착은 했으나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작은 동네인 줄 알았는데 청사 크기는 서울시청 못지않았다. 경계도 삼엄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레 정문을 통과해 보려다가 입구를 지키던 공안에게 붙들렸다.
여권을 확인한 그는 휴대폰까지 요구했다. 방금 전 인민정부 앞에서 청사를 촬영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오랜 기자 생활로 다져진 거짓말의 귀재였으나, 더위를 먹었는지 두뇌 회전이 쉽지 않았다. 아까처럼 학생이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얌전하게 사진을 삭제하고 방문 목적과 취지를 솔직하게 설명하느라 한참이 소요됐다.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일단 민원실 같은 곳으로 안내해 준 뒤 기다리라 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성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자신을 인민정부 외사판공실(外事办公室) 소속이라 밝힌 그는, 공손한 말투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묘한 이질감을 풍겼다. 사료 진열관에 대해 묻자 자신도 다른 부서를 통해 더 알아봐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이곳까지 찾아온 경위와 취지보단 이방인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더 낯설고 불편해 보였다.
그가 내놓은 결론은, 한국 영사관을 통해 정식 공문을 가져오거나 직원을 대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식 절차를 밟으란 이야기다. 전장시를 관할하는 상하이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은 반발심과 함께 명함을 요구했으나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이에 한 마디 더 따지려다 신변의 피곤함을 초래할 것 같아 돌아섰다.
시계를 보니 난징으로 가는 기차는 이미 떠났다. 멍하니 한참을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더운 공기와 좌절감과 허탈함으로 가득한 오후였다. 경험상 이런 종류의 무력감은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유효기간마저 길다.
어렵사리 평정심을 되찾고 나서야 100년 전의 그들을 떠올렸다. 낯선 땅에서의 어려움, 실패의 연속,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들도 수없이 좌절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혹독했던 건 끝없이 밀려드는 절망 속에서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닫힌 문 하나에 좌절하고 포기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었기를.
훗날 한국에 돌아와 알아보니, 당시 진열관은 이전이나 폐쇄가 아니라 보수공사 중이었다. 내가 다녀간 지 넉 달 뒤 새롭게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날 전장에서의 소동은 얕은 취재력과 칠칠치 못함이 낳은 해프닝이었다. 심히 부끄러웠지만 예감했던 최악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그럼에도 텅 빈 진열관의 굳게 닫힌 문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아 있다. 임시정부의 여정도 그런 문들의 연속이었을 터다. 닫힌 문을 밀고 또 밀어 다시 열어가며, 스스로의 시간을 새겨 넣던 사람들. 역사의 가장 뜨거운 한복판에서 좌절하고 포기할 권리 따윈 없이,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날 내가 느낀 감정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밟고 지나온 사람으로서 건져 올린 희미한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