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9
19살 한창나이에 은진중학교를 떠나 1935년 4월에 남경(南京·난징)에 이른 송몽규는 낙양분교 제2기생으로 편입되어 엄항섭·안공근 등 교관들한테서 군사훈련과 중국어를 배웠다. 일본의 압력으로 제2기생들은 낙양분교에 입학하지 못해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의 중국식 민가에서 합숙하며 훈련을 받아야 했다.
6월에 이르러 훈련소가 일본 관헌들에게 발각되는 액운을 당한다. 그래서 남경에서 150km 떨어진 강소성 룡지산 징광선사로 훈련지를 옮겨야 했다. 그것도 임대 기한이 차서 9월에 다시 남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낙양분교 제2기생들의 세 번째 훈련소는 남경 팔보가(八寶街) 23번지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세 명이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 훈련소를 다시 옮기게 된다. 네 번째 훈련소는 남기가(藍旗街) 8번지로 알려진다.
<송몽규 평전, 리광인·박용일>
전장을 떠나 장쑤성(江苏省)의 성도 난징에 입성했다. 과거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인 7대 고도 중 하나로 꼽히는 대도시다. 삼국지 오나라의 건업을 시작으로 5대10국 시대 남당, 명나라에 이어 20세기 중화민국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차원에서 이곳에 청사를 마련하고 머무른 적은 없다. 하지만 자싱–항저우–전장을 거치는 동안 난징은 늘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 도시 곳곳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스며 있다.
난징 기차역에 내려 곧바로 부자묘(夫子庙)로 향했다. 임정 활동의 유적지들이 이곳 주변을 둘러싸고 위치해 있어 베이스캠프로 삼기에 알맞았다. 부자묘는 난징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중국 도시마다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고풍스러운 거리다. 하지만 학문의 상징과도 같은 공자의 위패가 있어 전국에서 몰려드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중국의 교육열을 느껴보고 싶다면 부자묘에 와보면 된다.
북적이는 인파를 뒤로 하고 개천을 따라 5분쯤 걸어가니 회청교(淮淸橋)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30m 가량의 작은 돌다리지만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백범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 다리 밑에서 중국인 고물상 행세를 하며 2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백범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로부터 군사적 협조를 얻어냈고,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과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다. 단순한 도피의 세월이 아니라 임정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외교적 전환기였다.
백범이 장제스와의 협상을 통해 성사시킨 것이 바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설치다. 그의 총괄 아래 안공근·안경근이 실무를 맡았으며, 만주에서 활동했던 한국독립군 출신의 지청천·이범석이 훈련 교관을 담당했다.
한인특별반은 1934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3개 기수를 배출했다. 그중 2기생들의 눈물겨운 행적이 이곳 난징에 남아 있다. 이들은 입교를 위해 난징에 모여 교육을 받았는데, 일제의 압박으로 수개월 동안 세 차례나 훈련소를 옮겨야 했다. 2기생 중에는 윤동주의 친구이자 사촌 송몽규가 있었다. 영화 <동주>에서 박정민 배우가 멋지게 연기했던 그 인물이다.
이들의 교육이 이뤄졌던 난징 동관두 32호를 찾아보기 위해 한참이나 길을 누볐다. 회청교 인근이라는 대강의 위치만 알려졌을 뿐 아직까지도 정확한 장소는 특정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재정비된 동관두 거리는 29호가 마지막이고, 애초에 당시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니 이곳 어딘가에서 힘차게 구령을 외쳤을 젊은 독립군들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2기생들의 3·4번째 훈련소였던 팔보가 23번지와 남기가 8번지 역시 마찬가지다. 팔보가는 빽빽한 아파트촌과 번잡한 시장통이었고, 남기가의 경우 전신국 건물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실제 머무르고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 곳들, 그러니까 임정 청사나 기념관들과 비교하면 이런 곳들은 분명 막연함이라는 벽이 있다. 당시에 대한 직접적인 체감도 쉽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는 과정에서 감상이 풍부해지기도 한다. 흔적 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당시의 내음을 조금이라도 맡아보기 위해 오감이 곤두설 때 비로소 그들의 그림자에 가까이 다가선 느낌을 받는다.
길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백범이 장제스와 협상했던 장소인 난징 총통부로 향했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 안에 국민당 정부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공간과 전시물들이 비교적 깔끔하게 보존돼 있다. 그곳에서 백범이 드나들었을 총통 관저와 집무실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윤봉길의 의거로 국민당의 원조와 협력이 전폭적이고 수월하게 이뤄진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총통부를 둘러보면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세력의 심장부였고, 권력의 정점이었다. 이런저런 청탁 혹은 줄을 대보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문을 두드렸을 터다. 오늘날에도 강대국 정상과의 회담은 성사되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하물며 아무리 공동 항일전선에 서 있다고는 하나, 일개 식민지 그것도 임시정부의 대표자라는 초라한 직함뿐인 백범이었다. 대륙의 최고 권력자와 마주 앉는 기회를 넘어 협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은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백범은 장제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총통부 맞은편 호텔인 중앙반점에 머무르며 협상 전략을 고민했다. 당시의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중앙반점에 투숙할 계획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대대적인 내부 공사 중이었다. 아쉬웠지만 호텔에서 총통부까지 천천히 걸으며 당시 그의 심정을 더듬어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국의 장래가 달린 협상을 앞두고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에게 난징은 기회의 장인 동시에 절망과 가능성이 교차하던 전선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인특별반은 완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일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장제스의 결정으로 몇 기수 운영해보지도 못한 채 문을 닫아야 했다. 여기에 자금 지원까지 서서히 끊기면서 백범은 훈련생들에게 여비를 나눠주고 해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운영 과정에서도 아쉬움은 적지 않았다. 당초 백범의 제안으로 김원봉은 한인특별반에 의열단 청년들을 파견했고 지청천은 훈련을 담당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방향성과 방법론을 두고 각자의 입장을 좁히지 못한 채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기만 한 상황에서 저마다 마음은 조급했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는 달리 통신과 회합이 쉽지 않았던 그때는 서로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할 기회조차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식민지의 레지스탕트들은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길에서 독립운동을 해나갔다. 백범은 임정을 이끌고 숱한 고생 끝에 충칭에 터를 닦았다. 김원봉은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활동하다 충칭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지청천 역시 이 시기에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후 그들의 노선은 다시 갈라졌다. 하지만 그 갈라섬은 분열이 아닌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가능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들의 경쟁과 반목은 지금 시대 정치인들의 권력욕과는 달랐다. 불완전한 시대 속에서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진심으로 협력하고 공조했다.
본래 인간의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고 그들의 선택이 모두 옳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절망적인 힘의 부재 속에서도 결과에 다다르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끊임없이 현실을 조정하고 타협하며 생존을 이어가려는 노력이었다. 그 한계와 불안정성이 뚜렷함에도 역사는 그들을 실패자로 기록하지 않는다. 불가능을 전제로 한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