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1
문: 그대가 김방우인가.
답: 그렇다.
문: 조선혁명간부학교라는 것은 남경(南京·난징)에 있는 중앙군관학교라고도 하는가.
답: 그렇다. 표면으로 중앙군관학교라 하지만 내부로는 조선혁명간부학교라 부르고 있다.
문: 이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장은 누구인가.
답: 의열단장 김원봉이며 교관은 김원봉을 합하여 12명이었다.
문: 김원봉 이하 12명의 교관으로부터 의열단사, 조선의 정세, 경제학, 철학, 전술학, 당조직론, 폭탄의 제조법과 사용법, 총기의 사용법 등 약 20여 과목에 걸쳐 지도 교양을 받았는가.
답: 그렇다.
문: 김원봉과 만난 곳이 남경성내의 어디인가.
답: 사원(寺院)이었는데 어느 마치(町, まち)인가는 알 수 없다.
문: 김구라는 자는 의열단과 어떤 관계인가.
답: 의열단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지 못한다. 단 한번 우리들이 졸업할 당시에 와서 조선혁명을 위하여 매진하자고 격려한 일이 있다.
<김방우 신문조서,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
난데없이 숭례문이 불에 타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 닥친 2008년. 그해 가을 나는 교환학생으로 난징에 있었다. 마음만은 학구열에 불타오르고 싶었으나, 실상은 한량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며 국위를 하향시키느라 바쁜 하루하루였다.
그래도 퍽 강렬했던 삶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넓고 수려한 캠퍼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친구들, 자유를 넘어 무한한 방종으로 점철된 나날들. 학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날은 마치 내 인생의 골디락스 존을 벗어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머물렀던 난징대학교는 중국 5위권의 명문대다. 물론 교환학생인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위 ‘과잠’처럼 학교 티셔츠를 입고 난징 시내를 활보할 때면 이상하리만큼 선망의 눈길이 쏟아지곤 했다. 심지어 식당을 가도 시장을 가도 아낌없는 친절 공세에 시달리며 으쓱하곤 했던, 코미디 같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의열단장으로 유명한 약산 김원봉이 바로 그 난징대학교 출신이다.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 배우가 연기했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며 등장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다. 나는 그와 동문인 셈이다. 김원봉은 1918년 난징대학교의 전신인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학업을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 의열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15년 만인 1932년 난징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2009년 난징을 떠났다가 임정로드 취재를 위해 2024년 다시 방문한 것도 꼭 15년 만이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어딘가 묘한 운명의 냄새가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난징에서의 셋째 날 아침, 그 운명에 이끌리듯 김원봉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택시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남쪽 근교로 달렸다. 산속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조선혁명간부학교 터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택시는 나무가 울창한 흙길을 한참이나 달린 끝에, 길이 사라지는 막다른 곳에 나를 내려줬다. 야산 초입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공장 건물이 두 채 있었고, 그 사이로 산을 오르는 길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길은 육중한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이곳을 다녀갔다는 이들의 기록을 참고했었지만 그런 말은 없었는데, 시작부터 운이 따르지 않는 예감이 스쳤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다행히 공장에서는 인기척 대신 개 짖는 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다 철문을 낑낑대고 기어올랐다. 상당한 높이였지만 발 디딜 곳이 충분해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온몸에 녹 자국이 잔뜩 묻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막상 담을 넘어왔지만 등산로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GPS도 신호를 잃고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대충 산 정상 방향을 눈대중으로 가늠한 뒤 전진하기 시작했다.
산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앞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나뭇가지를 젖혀가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뎠다. 한여름의 산속은 서늘하면서도 숨이 막히게 습했고, 달려드는 벌과 모기를 쫓느라 땀이 줄줄 흘렀다.
한참을 걷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게 느껴졌다. 돌아가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이미 돌아갈 길을 잃은 듯했다.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풀어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계책을 알려준 아리아드네가 왜 내게는 없었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30여분을 걸었을까. 갑자기 길이 넓어지는가 싶더니 너른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건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ㄷ’ 자 모양의 빛바랜 단층 건물. 드디어 찾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건물은 골격만 남아있을 뿐 내부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천장이 사라진 밑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한때 도교 사원으로 사용됐었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오래전 일 같았다.
폐허에 부는 뜨거운 바람이 강렬했다. 이곳에 바로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있었다. 1932년 난징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서 학교를 세웠다. 스스로 교장을 맡아 ‘조선독립은 조선민족의 혁명으로’라는 교훈 아래 정치이론, 군사학, 폭탄·통신·첩보, 중국어·일본어, 국제정세 등을 교육했다.
병사가 아닌 병사를 가르칠 장교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의열단 활동을 10년 넘게 이어오면서 피로와 한계를 느꼈다. 폭탄과 암살로 대표되던 의열투쟁은 의기는 넘쳤지만 조직적 힘이 약했고 인재가 고갈되는 결과에 봉착했다. 그래서 무장투쟁의 발판을 위한 체계적인 인력 양성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매 기수마다 50명 내외로 총 3기수를 배출했다. 졸업생 다수는 훗날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이육사도 몸담고 있었다.
이곳에서 김원봉은 기상–훈련–강의–야간토론으로 이어지는 군사학교식 규율을 유지하고 청결과 절제를 강조했다. 생도들과 매일 토론을 갖고 무장투쟁에 앞서 지식과 사상의 중요성을 교육했다.
“폭탄을 던지는 법에 앞서 왜 던져야 하는가를 생각하라”
“혼이 살아 있어야 총도 의미가 있다”
“인민이 모르는 독립은 다시 하나의 지배일 뿐이다”
“러시아의 혁명은 러시아의 것, 중국의 혁명은 중국의 것이다. 우리의 혁명은 우리의 피와 흙에서 나와야 한다”
“너희는 내 후계가 아니라 내 동지다”
김원봉은 광복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고 남침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논란이 적지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도 뒤따른다. 하지만 일련의 역사적 사실은 아직 근거가 부족하거나 모호한 구석이 많으며, 갖가지 증언 역시 엇갈린다. 그래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적어도 조선혁명간부학교 시절의 그는 오히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엘리트가 아닌 민중을 혁명의 주체로 여기면서도 러시아 혁명의 핵심인 마르크스주의나 중국 공산당 이념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민족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도 그가 거듭해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실제로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은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같은 좌익 계열과 민족주의 우익 진영인 임시정부까지 흘러들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김원봉의 이 시기는 ‘폭탄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무기에서 인간으로, 폭탄에서 사상으로 진보하는 역사적 교차점이었다. 그렇기에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좌우 양 진영에 모두 씨앗을 남길 수 있었다.
100년 전 이곳에서 땀 흘렸던 청년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깊은 골짜기 속 산짐승과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척박한 폐허에서 꿈을 키웠을 사람들. 훗날 각자의 생각과 방법론은 달라졌지만 당시 그들을 지탱해 준 건 오직 독립된 조국이라는 목표였다.
이 폐허 속에서 건물의 골격과 잡초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마치 그때의 훈련과 결의의 흔적을 조용히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한때 이곳에서 땀 흘리며 꿈꾸던 이들의 결기가 그 시간의 틈새에서 나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