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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오는 전선, 갈림길의 정부

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4

by 모래의 남자
7월 초 양자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을 계속하던 일본군은 마침내 안휘성, 호북성, 강서성의 경계선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임정이 있던 장사(長沙·창사)와는 지척의 거리였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장사를 빠져나가기로 결정한 임시정부는 7월 17일 짐을 꾸려 광동성 광주(廣州·광저우)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장사에서 광주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백범은 장사에서 미리 떠난 후였고 석오(이동녕), 성재(이시영), 우천(조완구)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과 식구들을 합해 모두 백여 명의 인원이 함께 움직이려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7월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에 좁은 열차 안에서 백여 명이 복작거렸으니 피난가는 임시정부의 참담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장강일기, 정정화>




창사를 떠나 광저우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거리만 보면 난징–창사 구간보다 짧은 700km 남짓이지만, 피로도는 훨씬 심했다.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향하는 노선 특유의 인파와 북적임 때문이었을까. 출발부터 기차는 사람과 화물로 가득 차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발한 기차는 점심 나절을 훌쩍 넘겨서야 광저우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남부 대도시 특유의 활기가 곧바로 느껴졌다. 넓게 뻗은 도로 위로 끝없이 이어진 고층 건물들. 오늘날 광저우는 선전·홍콩·마카오와 한 축을 이루는 거대한 경제권이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이미 국제적인 도시였다.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교역이 발달했으며, 한인들도 많이 몰려들었다. 임정이 창사를 떠나 광저우로 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앞서 임정은 창사에 자리를 잡으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군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고, 또 다른 피난처를 찾아 나서야 하는 시점도 그만큼 빨리 도래했다. 사실 고민할 틈도 없이 짐을 싸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선택해야 했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그 끝이 보장된 것은 없었다. 지도 위의 선들이 하나씩 지워져 가는 가운데 남은 것은 단 하나, 떠나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수뇌부는 당초 광저우가 아닌 다른 지역을 물색했다. 1938년 7월, 임정이 중국 국민당 측에 보낸 공문을 보면 서쪽 내륙인 구이린(桂林) 혹은 서남부 멀리 위치한 윈난성 쿤밍(昆明)으로의 이동 계획을 밝히면서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백범은 돌연 후난성 주석 장즈중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임정이 광저우로 갈 것임을 털어놓고 기차편 그리고 광둥성 주석 앞으로 보내는 친필 소개장을 받아 돌아왔다.


임정이 보인 이 같은 갈지자 행보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갑작스럽게 피난처를 변경해야 할 만큼 당시 상황이 급박했다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어딘가 숨어들어 있을지 모르는 밀정과 일제의 첩보망을 따돌리기 위한 기만책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선택지가 사라져 가는 전선 위에서 탈출 자체가 목적이 된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임정 요인 및 가족들은 서둘러 특별 열차에 올라 광저우로 향했다. 가는 길은 순탄치 못했다. 공습에 나선 일본 공군기들이 수시로 날아들면서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들려오는 전투기 굉음 속에 숨죽여야 했던 순간의 아찔함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창사에서 광저우로 이동하는 기차에서 직접 지켜본 바, 비교적 개활지가 적고 산을 끼고도는 길이 많아 그나마 다행이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창사를 출발한 지 3일 만에 광저우에 도착한 일행은 광둥성 당국의 도움으로 임정 청사는 동산백원, 거처는 아세아여관에 마련할 수 있었다.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동산백원으로 향했다. 광저우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 인근 조용하고 깔끔한 주택가 사이의 한 건물이었다. 3층짜리 서양식 건물 두 채가 ‘ㄷ’자 형태로 연결돼 탄탄하고 반듯한 느낌을 줬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어느 재중사학자의 치열한 추적 끝에 2017년 정확한 위치가 확인됐다.


그러나 건물 안팎 어디에도 임정 청사임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나 설명은 없었다. 그저 ‘광저우시 역사건물’이라는 명패와 함께 1920년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소개글뿐이었다. 사드(THAAD) 갈등 이후 한중관계의 냉기가 표지석 설치조차 막아 세운 탓이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보니 중국의 근대문학 관련 작가들의 소개와 함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임정이 광저우에 오기 10년 전, 그러니까 1928년 이곳에 세워졌던 중국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를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건물의 내외부 형태와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니 임정 청사로 사용됐던 당시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 훼손된 임정 유적지들을 누비면서 발달한 상상력의 근육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임정이 광저우에 머문 시간은 석 달 정도에 불과하다. 폭염이 한창이던 7월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10월에 일본군이 광둥성에 상륙하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피난길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저우에 남아있는 임정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임정 수뇌부도 체류가 길지 못할 것임을 어느 정도 직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나 활동은 잠시 미뤘다. 그 대신 내부 결속과 항일 선전전에 힘쓰면서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만주사변 7주기 전시회를 열자 임정은 이봉창·윤봉길 의거 자료를 직접 전시하며 적극 참여했고, 한인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광저우 라디오 방송국의 협조를 받아 매주 두 차례씩 한국어·중국어·영어 방송을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청년 모집부터 동포 사회 결집과 국제적 연대까지, 임정은 불안정한 피난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최대한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광저우에서의 석 달은 단순한 쫓기기만 한 이동 시기가 아니었다. 전선은 몰려오고 지도 위의 안전지대는 사라져 가던 시간. 그럼에도 그들은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증명하며 다음 세대의 투쟁력을 모으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떠밀리던 피난길 위에서도 그들이 끝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흩어지지 않기 위해 붙들고 집중하려 했던 것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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