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臺灣, Taiwan

떠도는자의 기억법 #20

by 모래의 남자

3/5-14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정확히 10년 전 올라탔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낭만은 이제 다신 없겠다는, 여행이라는 방식으로 남겨둔 기억들이 있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얼마 전 중동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그 같은 생각은 더욱 강렬해졌다. 지구상에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거구나. 허무함의 끝에 밀려든 갑작스러운 조급함. 그 순간 충동적이고도 홀연히 대만으로 가는 항공편 티켓을 발권했다.


따뜻한 날씨와 맑은 공기가 더없이 포근했다. 감칠맛이 입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음식들도 하나 같이 훌륭했다. 곳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친절했고, 도시의 질서와 규범은 단단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바다 건너 훨씬 넓은 땅덩이의 그곳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주고받는 표현부터가 조금씩 달랐다. 군더더기 없이 차가운 대륙의 언어와 달리 조심스럽고 배려가 담긴 그들의 말은 일본의 그것과 퍽 닮았다.


대만은 많은 한국인들이 여행하는 나라 중 하나지만, 대개의 현지인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추정하곤 했다. 아니, 일본인이길 바라는 눈치였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하다. 같은 식민지 시기를 경험했음에도 다르게 남아있는 기억의 방향. 먼 옛날 대만 원주민에 중세 시기 중국 대륙 출신 본성인들의 정착, 1950년 국부천대로 넘어온 외성인들까지 복잡한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뒤섞인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그렇게 그들에게 일본은 우러러볼 선진국인 반면 한국은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느 정도 대등한 상대라는 인식이 느껴진다. 더구나 자신들을 대륙에서 몰아낸 중국과 그럭저럭 지내는-물론 경제적인 이유에서겠지만-한국과 달리 툭하면 대립각을 세우곤 하는 일본을 심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들이 공산당에 패퇴해 작은 섬으로 쫓겨오지 않고 대륙을 장악했다면 동아시아의 흐름은 어떻게 됐을까. 거대한 크기의 민주주의 체제 국가가 탄생했다면 한국이 과연 이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건 한국의 발판이 됐던, 20세기 후반까지 공산주의 독재 속에 발전이 더뎠던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실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중국 국민당-오늘날의 대만-정부 역시 한국을 좋게 말해 우군, 냉정하게는 속국으로 여겨온 역대 중국 왕조 및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복잡다단한 섬나라가 하루아침에 짓밟히게 되는 것에는 결단코 반대하며, 한없는 걱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머무는 동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만 영공을 초계비행하는 중국 전투기들의 굉음을 들으면서, 그동안 이들이 땀 흘려 구축해 왔을 다양한 문화와 음식과 삐딱한 자존심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번 방문까지, 이곳의 무엇이든 무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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