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세이 51
가족들이 잠든 밤, 이상하게 눈이 말똥거린다. 며칠 참았다 구입한 캡슐커피를 제동없이 연거푸 내려 마셨더니. 눈을 감고 새벽 빗소리를 듣고 있다. 빗방울이 난간에 부딪치는 간간한 빗소리에 귀는 더 쫑긋 비의 향방을 쫓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가 비만 오면 나가서 비를 맞고 걸어다니길 정도로, 비를 좋아했다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적막한 빗소리가 참 편안하다. 잊을만하면 여기 있어, 창을 두드리고 다시 두드린다. 적막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가끔씩 속삭이는 소리. 다시 찾아왔다 잦아들었나 하면 다시 오는,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소리.
적막하게 살아가고 싶다. 적막함 속에선 내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에 편안히 반응할 수 있다. 명상하듯 눈감고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전혀 확보되지 않을 땐 마음이 구겨져 간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표정도 일그러져 있을 터. 그럴 때면 마음에 주문들을 걸기 시작한다. 책에서 보고 기억나는 좋았던 구절들을 하나씩 염불 외듯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뽑아져 나온다. 저장됐다가 출력되는 책구절들은 내게 잠언, 명상 자체가 된다. '마냥 너그러운 마음도 없다, 삶을 사는 시간이 있고 증언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모든 건 디테일에 달려 있다, 배우자가 나도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겐 내가 삶의 배경이 된다, 상처없는 영혼처럼 살라, 일상을 채우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불라불라. 그러다보면 마음이 어느새 고요해진다.
언젠가 책을 읽어가는 이유가 순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문장들을 수집해 주문처럼 외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마음조절 내부장치' 같은 것. 단순하지만 꽤 절실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니까. 모래 놀이터에서 흙들을 모아 성을 쌓아가던 아이가 떠오른다. 비바람에 흔들릴 때면 책속 주문들을 외워 흙을 다시 메꿔가는 자신과 닮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조용히 책속에 고개를 파묻는.
비가 그쳤다. 고요한 밤 창을 두드리는 비가 무심히 갔다. 이제 그만 주문을 외우고 잠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잠도 마음조절 내부장치가 분명하니. 책이든 잠이든 깊이 파묻히고 싶은 밤.